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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하는 것이 바로 행복의 필수조건이다.
    - 베트런드 러셀

CoLoR (BLOG)

유치찬란한 대화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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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는 데카르트, 동양에서는 장자의 '호접몽'으로부터 시작되는 

'현실이 과연 진짜 현실일까'라는 고민을 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Brown의 한마디.

얼마전 일본의 한 학생이 지금의 현실은 모두 매트릭스일 뿐이라며 친구들을 해치고
자신은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접하고는 안타까웠습니다.
단지 상업영화나 만화 같은 곳에서 가끔 쓰여지는 '매트릭스' 클리셰는 사실 하루이틀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계가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거나,
또 현실에 대해 큰 불만족이 있다거나 고통을 받는다거나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믿고 싶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구요.
이 세상이 환각일지도 모른다니,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닫힌 세계에서는 어떤것도 그것이 정말 진짜인지 알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주관)와 실재하는 진짜 세계(객관)은 완전히 다를수도 있는 거죠.
오 이런, 믿을게 하나도 없어집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진짜일까

하지만 현실은 현실입니다. 매트릭스에서 깨어나는 법을 일러드리죠.
우리의 세계를 깨고 일어나서 새로운 것을 보여줄 것 같이 말했지만,
사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실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긴 합니다.
우리의 세상이 거짓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논리적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번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눈 앞에 컵이 있다면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요.
컵은 우리와 떨어져서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믿는것이지요.
하지만 그 컵이 진짜있는 것인지, 정말로 그런 생김새인지 
우리의 머리속에서 인식하고 있는 컵과는 다를수도 있는데요(심지어 매트릭스일수도 있지요)
이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믿음을 우선 접어버리면 됩니다.

해 보세요.
(1)나 - (2)내가 보고 있는 컵 - (3)세상에 존재하는(어쩌면 없을 수도 있는) 진짜 컵
우리가 3번을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 3번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3)번 즉 우리가 믿고 있는 세계를 괄호안에 넣고 판단중지를 하는겁니다.
'스위치를 끈다'고 표현하느데요, 어차피 알 수없는 진짜 세계는 아예생각하지 않기로하고
오직 '나'와 '내가 보고 있는 세계' 만을 남겨둡니다.
이제 컵은 진짜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을 내가 보고있었던 컵에서,
단지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내 의식세계 내의 컵으로 변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세상을 보면 뜻밖의 결론이 나옵니다.

매트릭스의 세계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진짜 '진실'이 극단적으로 다른 경우의 한 예입니다.
그렇다면 진실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진실'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것은 단지 여러 경험들에서 얻어진 하나의 직관일 뿐입니다.
그 컵이 실재하는지 환상인지는 판단을 보류해두고, 왜 우리가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는지 그 이유를 따져보는 겁니다.
타인들도 그 컵을 보고 만질 수 있고, 내가 소리치고 외친다고 컵이 사라지지 않으며,
여러 사람들의 공통된 성질이나 실재하는 상호작용들을 볼 수 있다는 것 등 많은 경험들이 쌓여
그 컵이 실재한다고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네, 그 컵은 틀림없이 실재하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 세계안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완벽한 속임수(환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이 세계안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컵을 손에 들어봅시다. 컵은 우리와 무관하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흐름안에서
나와 상호작용하며 그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정하고 한정된 시간의 흐름속에서 우리의 세계가 '있다'는 것에 놀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매트릭스일 것이라고 충격받고 일탈하지 마세요.
단지 세계가 '있는'것에 놀라고, 죽음앞에 놓인 우리의 유한한 삶을 우리와 실재하는 세계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신 '시간'을 일관되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참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 참고
후설 현상학, 하이데거 존재론.
- 에포케, 현상학적 환원, 본질직관, 현존재, 조르게,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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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선생님? Brown입니다.


선생님, 제가 갑작스럽게 편지를 드리게 된것은 선생님께 몇가지 가르침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고민해 오다가 깊은 정진을 가지고 계신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으려 무례함알면서 이렇게 편지로 선생님을 뵙습니다.

세 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보시면 너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부족한
저의 한심한 고민일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질문드리겠습니다.


(1) 첫번째는 '사후세계는 존재합니까?' 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이어서 당연히 사후세계를 너무 당연히 믿어왔지만, 하지만 과연 죽은뒤
의 세계는 존재할까요? 저보다 연세를 두배이상 많이 드신 분들은 또 연령층을 높여갈
수록 '죽으면 끝'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사람의 삶은 죽은 후에 다시 사람에게 되살아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죽은 사람도 직접적으로 산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적이 없습니다.
정말 죽으면 끝이 아닐까요? 아니면, 끝이라고 봐야하는 것은 아닐까요?
상관없다고 말씀하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후세계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부분이
대부분이지만 (단적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한다는 것에는 변화가 없을듯
합니다), 잘못되거나 힘든상황에 대한 대처같은건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여부에 따라
대처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습니까? 믿는다면, '하늘에 쌓에 두면서' 다음세상 또는 죽
은 후에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참고 이겨내겠지만(이것은 니체가 말한 패배자의 윤리와
도 통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 잘못된 상황은 반드시 고쳐나가야 하는 (잘못되었
기 때문에.) 그런 의지력을 보이고 현실세계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나지 않을
까요? 그렇다면… 과연 사후세계는 존재합니까, 선생님?


(2) '천국이란 어떤 곳입니까?'
질문이 이럴까...하고 생각하실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다음 가게되는 천국(지상낙원이라고 표현된 성
서구절도 있습니다만),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곳입니까? 성서에 적힌대로 '사자
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굴며,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고, 웃음
과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곳'입니까? 그렇다면 과연 사자가 어린양이랑 뛰놀고 독사
가 물지 않는다면, 행복할까요??? 그냥 조금 순한 사자와 물지 않는 독사가 나온 것이지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행복해질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독사와 사
자는 상징적인 표현이고 그것으로 비춘 삶도 무료하기 짝이 없을것 같습니다.
인간은 어쩌면 고통이 있기에 삶을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교회에서는 '천국'을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혼의 상태'라고 이야기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의문이 들어 저는 천국을 두려움, 고통, 힘듬, 불안 등이 완전
히 배제되고 기쁨 평화 찬미 찬양 사랑 희망 만으로 이루어지는 영혼의 상태가 천국이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니지 않을까요? 성서 여기저기를
봐도 신 조차 인간으로 인해 근심하고 인간의 악행으로 마음아파 하고 계십니다.
또한 '나' 라는 존재는, 기뻐하고 사랑하는 '나'만이 내가 아니라 고통받고
근심하는 '나' 역시 진실한 나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배제된 상태의 영혼이라면
진정한 나일수가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가르쳐 주십시오. 천국은 어떤곳입니까?


(3) '정말로 옳은 것'이란 있습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늘, 항상, 시대를 넘어서, 변함없이, 시공과 인간과 자연을 초월해
서 '옳은 것'이란 있을까요? 교회의 대답은 당연히 'Yes'입니다만, 그대답의 근거라는 것
이 성서에 적혀있기 때문, 또는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기 때문에 선생님
의 생각을 가르침 받고 싶습니다. (교회의 말씀은 내가 아는 우스게소리와 같은거 아
닐까요? 어느 군대 훈련병에게 조교가 '훈련용소총은 반드시 호두나무로만 만드는 이
유'를 묻자, 훈련병들이 '안썩기 때문'이니 '단단하기 때문' '내구성과 휘어짐이 없기
때문'이니 대답을 하자, '아니다. 그 이유는..' '육군규정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그 우스게 소리요. 종교와 철학의 분기점이 아닐까 싶은데요. 뭐든 그렇기 때문
에 성서에 적고 교회법을 만들고, 또 성서에 적혀있고 교회법이기 때문에 그런것이고..)
썰이 길었습니다만, 진실로 옳은것 '절대 정의(?) 지식(?)'이란 있을까요? 간단히 생각
해 본다면 A라는 사람이 옳다고 아는 것은 다른 B나 C가 그것을 함께 옳다고 생각하
기 때문이고, 또 B나 C가 옳다고 여기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옳다고 여기
는 것이고… 그것이 끝까지 간다면 누군가 '진짜로 옳은 것'을 아는 사람이 제일 뒤에
있어야 그것이 옳은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진짜로 옳은 것을 알고 있습니까?
네, 물론 신께서 알고 계십니다. 신이 진짜로 옳으니 믿어야지... 그렇게
사람들의 제일 끝에서 있다면 옳겠으나, (그것은 불가능하겠죠(그것도 일일이)? 네,
물론. 그렇다고 진실로 믿.을.수.는 있겠지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정말로 옳은 것을 우리는 신, 또는 하느님이라고 부를수도 있겠지만, 인간들만이 모여
사는 이 세상에는 그럼 '정말로 옳은 것'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거의 대부분
의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것'은 있을지언정 '옳은 것'은 없는것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또는 내가) 믿고 말하고 진실이라며 굳게 믿는 것들 역
시 옳지 않을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 무엇이 옳은 것일까요? 모든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라면, 저는 어떤것을 기준으로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
을까요? 그것을 누가 알려주는 겁니까? 아니면 혼자서 용맹정진하며 (마치 석가
가 보리수 밑에서 한것이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하신것 처럼) 자신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알수 있는 것일까요? 옳든 그르든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무엇일까요? 또한
교회만이 진실로 옳은 교리를 가지고 진실로 옳은 진리를 전파한다는 것이 아닐수
있다면, 다른 종교들 역시 옳을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내가 맞을 수 있다면 너도 맞
을 수 있을것 아닐까요?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사람들이 설파한 '神, 하느님'이라
는 분은 완전한 착각이며 진짜 하느님은 완전히 다른분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진실로 옳은 것이 있느냐, 무엇이냐, 없다면? 이라는 생각 때문에 정말 무수한 의문들
이 생겨납니다. 어찌보면 앞의 두 의문역시 이것때문에 발생한 의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족하고 짧고 모자란 앉은뱅이 소경 한명이 선생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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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컴의 면도날 Ockham's razor

윌리엄 오브 오컴 Wiliiam of Ockham(대략 1285~1349) 은 영국의 백작령 서리 Surrey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규명하는데 평생을 바쳤다고 하는군요.
이 중세시대의 수도자는 이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논쟁들 속에서 무의미한 진술들을 제외해야 겠다고
마음먹고, 1324년의 어느날 그의 저서에 등장하는 대로

" 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cesitate. "
" Frustra fit per plura quod potest fieri per pauciora. "
보다 적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세우지 말라.

의 말로 오컴의 면도날 Ockham's razor 을 도입해 무의미한 진술들을 토론에서 배제시키자고 제안합니다.

흔히 '경제성의 원리 Principle of economy' 라고도 불려지는 이것은 필요하지 않은 가설을 잘라내 버린다는 비유이며,
필연성이 없는 개념을 배제하려 하는 '사고절약의 원리 Principle of Parsimony'라고도 불립니다.

오컴의 면도날이 의미있는 것은 현대의 과학 이론을 구성하는 기본 지침이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설이나 이론을 세울때, 또는 그것을 토론할 때 같은 현상에 대해 다른 가설이 있다면 가정이 더 많은 쪽을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생활속 토론이나 자신의 사고를 정립할 때도 효과적이겠지요.

2. 브레너의 빗자루 Brenner's Broom

오컴의 면도날에 정반대되는 도구가 바로 브레너의 빗자루입니다.
시드니 브레너 Sidney Brenner 는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영국의 분자유전학자입니다.
당시 신생학문이었던 분자유전학을 연구하며, 그와같은 새로 생겨난 학문이 기존 학문분야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기위해서는
과감해져야한다고 말하며 이 빗자루를 만듧니다.
그는 우선 새로운 가설이나 발견, 새로운 아이디어가 당장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탁월한 아이디어와 명쾌한 통찰력을 믿고 우선 그것을 용감하게 발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았거나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내용은 브레너의 빗자루로 양탄자 밑으로 쓸어넣으면 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여전히 양탄자 위에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는지, 그럴 마음이 계속 드는지를 검토하라는 것이죠.

(에른스트 페터 피셔 '슈뢰딩거의 고양이' 에서 일부 발췌)

3.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문제로 토론을 벌이거나, 발생한 현상의 문제를 찾을 때 오컴의 면도날은 효과적인 가이드를 제시합니다.
여러 가능성중에서 가장 '~~한 상황이라면'이라는 가정이 많이 들어간 생각을 잘라내버리면 되는 것이죠.
수많은 가능성과 가설 속에서 헤매일 것 없이 그것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며 오컴의 면도날을 빌려 하나씩 잘라나가는 것이죠.
실제로 오컴은 신에게까지 자신의 면도날을 들이 밀었다고 하는군요.
(정확하게는 신의 존재에 대한 가설들에 대해서요. 어차피 신의 존재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네요.)

하지만 우리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지식의 프론티어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골몰하고 있다면,
오컴의 면도날은 잠시 도구함에 포개두고 브레너의 빗자루를 꺼내는 것이 좋겠네요.
어쩌면 지식이나 통찰은 갑자기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서 그 뒤에오는 세부사항에 대한 증명이 없다거나,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양탄자 밑에 착착 쓸어서 넣어두고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도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컴의 면도날, 브레너의 빗자루, 둘 다 모두 재미있는 비유를 가진 흥미로운 개념입니다.


2009.10.15 00:36

기형도,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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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나는 기형도의 글이 좋다.
어지러운 감성을 건드리는 그의 풍부한 어휘들과,
건조한 듯 어두운 회색빛 나는 글의 분위기,
글을 읽고 있지만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한 묘사와 비유들.

지금도 가끔 여유를 느끼고 싶을때면 그의 전집을 꺼내서
하나씩 읽어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표현과 언어,
그 속에 하나씩 나타나는 주제들에 놀라곤 한다.

그런 글을 써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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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술기운이라고 하시지만,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신자를 일컬어 ㄱㅅㄲ라니요.
그것도 강론때 단지 주보를 본 것 뿐인 분들인데요.
말씀이 좀 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평신도이고, 영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신자일 뿐이지만,
그래도 머리속에 계속 말들이 맴돌아 마음속 얘기를 좀 넋두리 해볼까 합니다.

'신부님께서 특별히 뛰어나거나 내세울 것도 없으시다"는 겸양의 자세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라고 또 특별히 잘나거나 뛰어나지 않으니, 내말을 따라오는 것도 좋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셨네요. 또 "가톨릭은 민주주의가 아니"라든지,
"교계제도 내에서 신도들은 (교계 제도상 하위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제의 말을 따라야 한다"
(정확하게는 '똥을 집으라고해도 군소리 없이 집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먹을 쥐시며) 때리겠다" 라는 말도 곁들이며요.)

맞습니다. 저희는 당연히 본당 지도 사제를 존경하고 당신을 따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부님의 인성과 신앙, 영적 수행,
남들이 갈 수 없는 길을 기꺼이 선택하여 가신 것에 대한 존경,
예수님을 닮으시려 인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모범을 보이심에 대한 경외심,
신부님이 되시기까지의 10년이 넘는 고뇌와 수행의 시간들에 대한
존경심에서 당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제가 단지 교계제도(그러니까 교회의 그 지휘체계) 상에서 평신도 보다 위에 있으니까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씁입니다.
'내가 너보다 위니까 까라면 까라'는 ("까라면 까라"는 말씀도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카리스마 중에서도 가장 하위에 있는 조폭들이나 내세우는 권위입니다.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러한 이유로 사람을 움직이려하면
열에 아홉은 반감을 가질 것입니다. 특히 건전한 생각과 패기를 가진 청년이라면 당연할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말씀하셨지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이 원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불의하지 않은 것일 뿐 사회제도와 상관 없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까라는 까'식의 협박은 사회 어디에나 있습니다.
"너 몇급이야!" - 그 '민주주의' 국가를 운용하는 국가기관에도 있구요,
"이러고도 월급받고 싶어!" - 돈으로 협박하는 회사에도 있습니다.
"니가 뭘알아? 내가 박사야!" - 지식의 상아탑에도 엄연히 있습니다.
"까라면 까"라는 군대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요. (거기야 그렇다 칩시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국민 여러분은 제가 시키는 대로 그냥 하세요" - 모든 악덕 독재 정권은 항상 그렇습니다.
주먹으로 협박하고 목숨으로 장난치는 조폭 어르신들이 대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건 민주주의와 어쩌고를 논할 것이 아닙니다.
'정의'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사회제도와 상관 없이 '정의'가 있는 곳에는
강제와 강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딱히 신도에 대해 강제할만한 것이 없는 성당에서는 더할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이고 공염불입니다. 신자를 성당에서 내치시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냥 신부님을,
단지 '사제이기 때문에'가 아닌 '사제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으로 따를 수 있도록 해주십쇼.

덧붙여 교계제도 어쩌고 문제는, 사실 신부님께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전에도 두어번 들어봤었는데(모두 새 신부님이시긴 하셨습니다만),
도대체 이 내용을 신학교에서 '신자는 너의 어린양들이니 결국 무조건 니말을 따라야 한다' 식으로
가르치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몇번 듣다보니 이젠 제발 이것에 대한 올바른 적용도
함께 좀 익혔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다음, 그 ㄱㅅㄲ 문제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미사중에, 그것도 사제 강론중에 강론에 집중하지 않고 딴짓을 하다니요.
올바른 행동은 아닙니다. 그런데요,
사실 생각해 보면, 강론중에 아니 미사중에라도 주보를 보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미사전에 주보를 나누어 주겠습니까.
오히려 신부님의 강론이 주보보다 흥미롭지 못하다는, 주보한테 신부님 강론이 진거 아니겠습니까?
이전에 들었던 강의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전날 참석자 전원이 밤을 새다시피해서 정신이 없을 때였는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자기가 미국에 MBA 과정을 들을때 있었던 일이다.
강의 마치고 다들 골프치고 여가를 즐기느라 학생들(MBA니 지긋하신 분들이 많으셨을 겁니다.)이
강의 중에 많이들 졸았다. 강의를 하시다가 보다 못한 교수가 제일 앞에서 자고 있는 학생의 옆에 앉아있는 분에게
'좀 깨우라'고 말을 했답니다.
그러니까 그 학생이 '왜 나한테 그러느냐? 재운 사람이 깨우라." 라고 대답을 했다네요.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조는 것은 여러분들 잘못이 아니다. 모두 내 잘못이다. It's not your fault. It's all my fault.'
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강의를 졸지 않고 끝까지 아주 잘 들었습니다.

왜 신자들이 신부님의 강론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신부님께서 화를 내십니까?
그것이 버릇이 못돼먹은 신자들만의 탓일까요?
가끔 저도 신부님들의 대중연설 능력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때가 있습니다.
일기 써온 것을 그냥 죽~ 읽으시는 수준의 분들이 계서서 안타까울때가 있습니다.
비슷한 종교의 어떤 분은 40만의 신도 앞에서 설교를 하지만 그 40만 대부분이 그 말씀 하나하나를 빠뜨리지
않으려 하기도 합니다. 만약 신부님이 아니라 주교님이나 루터킹 같은 분이 강론대에 서 있었다면
주보를 펴는 사람이 많았을까요, 적었을까요.

게다가 자신의 뜻과 맞지않는 신자를 가리켜 ㄱㅅㄲ라니요.
아무리 술기운이시라지만, 지도자의 지위에 있으신 분께서 아무 생각없이 하시는 말들에도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을 수 있고 잘못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생각해도 이런데,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혹시나 가시나무속에서 어렵게 싹튼 그 사람의 신앙을 뿌리채 뽑아버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신부님 얼굴 뵐때마다 자꾸 생각나고 머리속에 아른거려서,
한번 끄적여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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