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Clouds

New Postings

  • 완성이라는 것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빼낼 것이 없을 때 얻게 되는 것이다.
    - 생텍쥐페리
조회 수 6341 추천 수 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LG 인화로 일군 도전·개척 60년] - 서울경제신문

[LG 인화로 일군 도전·개척 60년] <1> 도약 확장으로 미래를 준비하다

김현수 기자 hskim@sed.co.kr



지난 1970년 1월 6일 서울 관철동 대왕빌딩의 럭키그룹 본사 회의실. 구철회 럭키화학 사장이 단상에 올라 짧게 말했다. “저는 물러납니다. 돌아가신 회장님의 뜻을 펼쳐나가는데 유일한 적임자로 구자경 부사장을 추대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영권 갈등에 대한 세간의 일부 우려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국내 대기업사상 첫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사흘후 열린 합동이사회에서는 구 부사장을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추대하고 그룹 운영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조용하지만 빠르게 세대교체를 마무리 지었다.

세계화·성장돌파구열어
해외합작…사업 다각화…R&D 투자
70년 금성사 기업공개…기술합작등 잇단추진
74년 럭키화학, ㈜럭키로 개명 여천공장 건설


구자경 회장(현 LG그룹 명예회장)은 취임식에서 “급속한 확대보다는 내실 있는 안정적 성장을 추구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룹 내부에서는 준비된 회장다운 발언으로 평가됐다. 사실 구 명예회장은 20년 동안 고된 경영수업을 받았다. 덕분에 어느 공장에 가도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기계가 없을 정도였다.

구 명예회장은 취임과 함께 호남정유, 한국콘티넨탈카본 등의 투자에 따른 자금 압박에 부딪혔다. 그의 선택은 기업공개를 통한 자본과 경영의 분리였다. 취임 첫해인 70년 럭키화학과 금성사를 공개하고 74년 금성통신, 76년 반도상사, 금성전기, 범한화재, 78년 금성계전 등을 차례로 공개했다.

또 해외자본 유치 및 기술 합작 등을 잇따라 추진하며 합작사만 20개사에 이를 만큼 국내 기업의 세계화를 선도하며 성장의 돌파구를 열었다. 구 명예회장은 2기 럭키그룹을 출범시키며 조직의 운영을 회의체로 바꿨다. 훗날 회의체 중심의 경영방식은 자율경영이란 LG 고유의 경영형태의 모태가 된다.

구 명예회장이 그룹 경영을 맡은지 4년째였던 지난 94년 2월. 럭키화학은 ㈜럭키로 사명을 바꾸고 세계적인 수준의 종합화학회사로 성장하기 위해 울산공장을 건설하고 여천공장 건설에 돌입했다. 당시 대표이사이던 허신구 사장(현 GS리테일 명예회장)의 주도 아래 럭키의 제품은 국내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아직도 합성세제의 대명사로 불리는 ‘하이타이’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같은 해 7월 럭키는 전라남도 여천 석유화학단지에 석유화학 관련단지 조성 사업계획을 승인받고 종합석유화학회사로 발돋움 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1단계 사업인 PVC레진 에 이어 ABS, 글라스파이버 공장을 준공하며 석유화학 기업으로 면모를 갖췄다. ‘플라스틱 빗’으로 출발했던 LG가 24년만에 석유화학 원료생산의 꿈을 일궈낸 셈이다.

구평회 사장을 사령탑으로 바꾼 호남정유는 70년대초 서울 본사 빌딩이 들어있던 대연각빌딩 화재, 여수공장 화재 등으로 아픔을 겪지만 꾸준한 확장과 함께 LPG, 폴리프로필렌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는데 성공했다.

석유화학사업이 70년대 첫 발을 내디뎠다면 전자사업은 이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73년부터 구미, 창원, 평택, 구로 공장이 잇따라 건설됐다. 특히 75년 설립된 구미 TV 공장은 3차례에 걸친 증설을 추진하며 79년부터 히타치와 기술제휴로 컬러TV를 생산한다. .

연구개발(R&D) 투자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76년 민간기업으로는 처음 금성사가 중앙연구소를 설립하고 79년 충남 대덕연구단지에 석유화학 중앙연구소를 설립해 국내 화학기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여 나갔다.

사업영역 확장도 계속됐다. 70년 범한화재를 인수해 보험업에 진출하고 금성전기와 금성전공을 설립, 방송통신장치 및 무선통신 분야를 전문화하며 LG의 이동통신사업 및 첨단 IT산업의 기반을 만들었다.

구 명예회장이 취임한지 10년이 지난 1980년. 럭키그룹은 23개 계열사와 5만3,8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국내 최정상 기업으로 올라서게 된다. 70년 520억원에 불과하던 그룹 총 매출액은 79년 1조2,280억원으로 불어났고 미국의 포천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중 13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30돌 LG화학 여수공장 초기멤버들
“개척자로서 초심 잃지않을것”


“초기엔 플라스틱 원료인 PVC레진을 생산하기 위해 한밤중에 불로 일일이 녹이면서 작업하느라 고생깨나 했죠.”

올해로 30년만을 맞는 LG화학 여수공장의 공채 1호인 이재표 PVC 혁신파트 실장은 “여수 겨울날씨가 원래 3~5도 정도인데 76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며 갖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생산 초기의 어려움을 이렇게 회상했다.

지난 77년 11월15일 첫 가동에 들어간 LG화학 여수공장이 짧은 기간에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메카로 우뚝 선 데는 이 같은 현장인력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성춘 LDPE생산팀 실장은 “76년 당시 파이오니어(개척자)라는 글자가 새겨진 러닝화에 장화 차림으로 교육을 받는데 양철지붕에서 나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강사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최 실장은 “당시 하숙집 주인이 럭키 다닌다고 하니 치약이나 칫솔 좀 구해달라고 부탁해 난처했던 적도 있었다”며 활짝 웃었다.

처음 공장이 돌아갈 때만 해도 물이든 전기든 제대로 갖춰진 게 하나도 없었다. 때문에 공장 가동시간을 줄이는 비상조치를 취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78년 입사했던 황규명 열병합 실장은 “태풍이 불면 전력공급이 제대로 안돼 눈물을 머금고 공장 가동을 줄여야만 했다”고 말했다.

지난 30년을 한결같이 여수공장을 지켜온 생산초기 멤버들은 한결같이 “아직도 준공 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면서 “LG 여수공장이 30년을 지나 60년, 100년까지 계속 커나갈 것으로 믿는다”고 입을 모았다.



[LG 인화로 일군 도전·개척 60년] (2) 과감한 선택·결정

"남보다먼저"… 성공밑거름
故구회장 자본주의 받아들여 장사 시작
중앙시장에 포목점 열고 빠른 투자로 큰돈
47년 락희화학공업사 설립 허씨일가와 동행
외제 판치던 화장품시장 도전 LG 초석 다져



진주=김현수 기자 hskim@sed.co.kr




지난 47년 1월15일 출범한 후 LG그룹 60년 역사의 시발점이 된 옛 락희화학공업사의 전경.

◁ 고(故) 연암 구인회 회장이 지난31년 포목점 영업을 시작한 옛 ‘구인회 상점’의 상가터.

△ 락희화학이 첫야심작으로 선택한 락희크림.

△ 고(故) 연암 구인회 회장의 생가.

지수초등학교 상남관



진주시 대안동 중앙시장.
시장 개장 122년째를 자랑하는 이곳이 LG그룹의 시원(始原)인 ‘구인회 상점’을 시작한 곳이다. 백화점, 할인점 등 대형 유통체인들이 위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부경남 상권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 5일 기자가 찾아간 ‘구인회 상점터’는 옛 건물의 흔적조차 없었다. 대신 옷 가게 두 곳이 나란히 자리를 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76년이란 시간이 흘러 포목점이 캐주얼 의류 가게로 진화한 셈이다.

주변 상인에게 이 자리의 유래를 물었지만 잘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LG그룹 창업주인 고(故) 연암 구인회 회장이 ‘구인회 상점’이란 간판을 내걸고 진주 중앙시장에서 포목점을 시작할 때가 1931년. 지금부터 76년전이다. 당시 사농공상의 위계가 엄연하던 시절 교리집안(연암의 할아버지가 홍문관 시독을 지냄)의 장손이 장사를 시작한다는 건 대단한 모험이었다.

특히 포목점 개업 이듬해 진주시내 전체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발생해 구인회 상점도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출발치고는 영 개운치 않았지만 연암의 탁견이 빛을 발한 것이 바로 이 때였다. “홍수 뒤에 대풍년이 온다”며 오히려 포목들을 잔뜩 사들였던 구인회 상점은 이 결정으로 큰 돈을 쥐었다. 현대 경영의 시각으로 보자면 ‘경기를 미리 예측하고 과감하게 투자한 것’이 성공으로 이어진 셈이다.

연암은 단순히 돈 버는 데만 집착하지 않았다. 백산 안희제 선생을 통해 1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건네는 등 나라잃은 민족의 청년으로서 해야 할 일을 실천했다. 일제의 감시 속에 죽음까지도 무릅쓴 연암의 기부는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LG가 그룹 역사 60년의 시작으로 삼는 ‘락희화학공업사’가 출범한 것은 1947년1월5일(법인 등기를 끝마친 것은 3월25일).

해방후 진주에서 부산으로 사업터전을 옮기고, 무역업을 시작할 즈음 같은 마을(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 살던 만석꾼 허만정씨가 그 해 연암의 사업에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며 당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 허준구(허창수 GS그룹 회장의 부친)씨를 합류시켰다.

이 때부터 이후 반세기 넘게 구씨, 허씨 양가의 아름다운 동행이 시작됐다.

동업자를 맞이한 연암이 첫 야심작으로 선택한 것이 화장품(락희크림). 당시 화장품은 외제가 판을 쳤었다.

연암은 그때 “손댔다 하면 틀림없이 고생할거다. 손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남들이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대서 남 보다 먼저 달려가야 승리한다”며 허씨를 독려했다고 한다.

누구보다 빨리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사업을 일으킨 연암의 과감한 선택과 결정은 60년 LG의 단단한 뿌리였다.

부산 서대신동 락희화학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연암을 ‘파카 코트(미군 장교들의 상의) 사장님’이라고 불렀단다. 소매가 닳고 기름때가 잔뜩 낀 이 옷만 입어서 직원들에게 파카코트는 부진런하고 성실한 연암의 트레이드 마크.

1927년 문을 열었다는 진주 중앙시장 천황식당 주인의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쏟아져 나온다. “(지금 앉아있는 곳이) 80년 된 탁자 아입니꺼. 유명한 사람도 밥 묵고 했지예. 후딱 식사 하이소.”

혹시 연암이 이 탁자에서 바쁜 시간을 쪼개 비빔밥에 막걸리를 곁들이며 형제들과 더 큰 장사를 논의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 구인회·이병철·조홍제 회장 등 배출 진주 ‘지수초등교’
한국 기업사 유산으로 자리매김


흔한 시골초등학교 풍경이다. 2층에 불과한 낮은 교사에 흙 먼지 날리는 운동장.

진주 남강 염창 나룻목에서 5리 길인 지수초등학교는 학생수도 규모도 크지 않은 시골학교다. 하지만 한국 기업사의 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기업역사기행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연암 구인회 회장과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 효성그룹 창업주인 만우 조홍제 회장이 바로 이곳 출신이다. 1명도 어려운 대기업 총수를 3명이나 배출한만큼 한국 기업사를 한몸에 품고 있는 학교임에 분명하다.

지수초등학교(당시명 지수보통학교)는 1921년 구씨와 허씨의 집성촌으로 부촌이었던 지수면 승산마을에 들어섰다. 연암은 학교 정문에서 200m남짓 거리에 떨어져 있는 생가에서 호암은 15m정도 떨어진 허씨가로 출가한 둘째 누이 집에서 다녔다.

구 회장의 지수보통학교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밀려오는 신문명에 대한 호기심은 그를 2년 뒤 서울 유학길에 오르게 했다.

지수초등학교 교사 앞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있다. 원래는 세 회장이 3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3그루의 나무는 세월이 흐르며 몇해전까지 한 뿌리로 합쳐져 있었지만 이제는 한 그루가 죽고 두 그루만 남아 양쪽으로 가지를 뻗어나가고 있다.

13회 졸업생이면서 해방후 한국전까지 3년간 지수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학교 사랑은 각별하다. 2000년 농촌학교 통폐합 정책으로 폐교 위기에 처했던 지수초등학교에 구 명예회장은 체육관을 설립하고 장학금을 전달하는 등 학교 살리기에 힘을 기울였다. 이를 기념해 학교측은 체육관의 이름을 구 명예회장의 호를 따 상남관이라고 붙였다.



[인화로 일군 도전·개척 60년] <3> 플라스틱을 만들어 보자

"생활용품 만드는게 애국" 화학산업 도전…53년 빨간색 빗 첫 생산
안깨지는 미군 화장품 뚜껑 보고 진출 결심
57년 국내 첫 공채실시 인재경영 첫발 디뎌

부산=김현수 기자 hskim@sed.co.kr




“안 깨지는 뚜껑 좀 만들어낼 수 없나.”
연암 구인회 사장의 눈썹이 삼각형으로 곤두섰다. 언짢은 일이 있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다.

새로 선보인 ‘럭희크림’의 주문이 쏟아졌지만 정작 상품을 보냈더니 화장품 용기 뚜껑이 다 깨졌다. 도매상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친 것은 당연한 결과. 연암의 동생인 구태회 전무가 장충동집 마당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베이클라이트(합성수지)를 녹이며 수없이 실험을 되풀이한 것이 그때였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연암이 용기 뚜껑에 대해 가졌던 불만은 훗날 LG화학이라는 거대 석유화학기업을 만드는 토대가 됐다.

“우리 플라스틱 한번 만들어보자.”

LG가 화학산업에 눈을 돌린 시점은 지난 51년 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우연히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화장품 뚜껑을 살피던 연암은 ‘PLASTIC’을 처음 보고 “바로 이거다”라며 무릎을 쳤다.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찮았다. 전쟁의 상흔이 깊어만지던 때 아무리 장래성 있어 보이는 사업이라 해도 가진 것 모두를 털어넣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당시 연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게(플라스틱 사업이) 진짜 사업이다. (전쟁 중에도) 국민의 생활용품을 차질 없이 만들어내는 기 애국이다. 니들 생각은 어떻노.” 기업인 구인회의 진면목이다.

53년 8월. 미국산 사출성형기ㆍ금형ㆍ원료 등을 확보한 동양전기화학공업사(LG화학의 전신)는 하루에 350개 정도의 빨간색 플라스틱 빗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빗이 부산국제시장으로 넘어가면 이것을 먼저 받기 위해 새벽마다 줄을 서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단다.

빗에 이어 비눗갑과 칫솔을 만들던 시절 범일동 공장에는 두 사람이 밤잠을 설쳤다. 구자경 상무와 고(故) 허학구(허전수 새로닉스 회장의 부친) 전무가 주인공. 말이 상무고 전무지 얼굴에 기름때를 묻히고 새벽잠을 설치는 공장 막일꾼이나 다름없었다. 훗날 애지중지하는 장남을 왜 그리 고생시켰냐는 질문에 연암은 “귀여운 자식에게 한대를 더 주는 거 아니요”라고 답했다.

플라스틱 산업의 문을 연 연암이 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처음 시작한 것이 사람에 대한 투자였다.

서울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열 당시 연암은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멀쩡하게 조선통운에 다니던 허신구 현 GS리테일 명예회장을 불러들였다. 장사에 문외한이라던 허 명예회장에게 연암은 이렇게 말했다.

“보래. 서부활극 봤제? 아무도 안 사는 땅에 먼저 가서 말뚝 박고 말도 기르고 씨 뿌리는 사람이 안 이기드나. 니가 카우보이보다 못할 기 뭐 있노. 내일 저녁 물건 갖고 올라가게.”

기업인 구인회의 사람 욕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57년 봄. LG화학은 국내 기업 최초로 공개채용을 실시했다. 지연ㆍ학연 등을 무시하고 신문에 낸 채용 공고는 당시 사회에 충격이었다. 채용된 7명은 아무런 사전교육도 없이 곧바로 현업에 배치됐다.

“밑바닥부터 일해야 프로가 될 수 있다”는 연암의 신념에 따른 것이다. ‘LG 인재경영’의 막이 올라가는 순간이다.

LG가 비닐장판 등 플라스틱 제품을 집중적으로 생산했던 곳은 부산 연지동 공장. 당시 럭키화학이 플라스틱 빗에서 PVC 파이프, 비닐장판으로 품목을 넓혀가며 화학과 전자산업의 토대를 다지던 곳이다.

신년 초 기자가 찾은 연지동 공장터는 ‘LG 부산청소년과학관’으로 변신해 어린이들에게 과학에 대한 꿈을 키워주는 곳이 돼 있었다. 앞선 시대를 그려보던 연암의 꿈이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꿈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인화로 일군 도전·개척 60년] <4>전자산업의 샛별, 빛을 말하다

"우리 손으로 가전제품 만들어보자" 국내 첫 전자공업사 '금성' 탄생
59년 라디오 이어 냉장고·TV등 잇단 생산
67년 정유사업 진출 여수産團 밑그림 그려



김현수 기자 hskim@sed.co.kr




“우리가 그거 맨들면 안되는 기요? 기술이야 배워오면 되고 안되면 외국 기술자 델고 오면 되는 거 아니오.”
지난 57년 연초 락희화학 사무실. 윤욱현 당시 기획실장이 하이파이 레코드에서 흐르는 음악에 잠을 설쳤다는 얘기를 듣던 연암 구인회 사장이 느닷없이 또 다른 도발을 했다.

윤 실장은 물론 한자리에 있던 여타 임원들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연암이 누군가. 당황하는 임원들의 표정을 ‘내몰라라’ 하며 사업검토를 지시했다.

기실 연암의 뇌리에는 예전 일본 통상성이 발표한 통상백서에서 석유화학공업과 전자공업이 유망산업이라는 내용이 떠올랐다.

이후 한켠에서는 기계설비 도입을 위해 예산을 확보하고 다른 한켠에서는 독일인 기술자 헨케(H.W.Henke)를 생산책임자로 영입했다. 헨케는 LG그룹 최초의 외국인 직원.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시작한 신규 사업 프로젝트는 이듬해인 58년 10월1일 금성사라는 국내 최초의 전자공업회사 설립으로 이어졌다. 금성은 화려하고 신비할 뿐만 아니라 무궁한 수명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전자제품 이미지에 딱 어울렸다.

첫 작품은 라디오. 태풍 ‘사라호’가 남해안을 할퀴고 지나간 59년 11월12일 부산 연지동 공장 직원들은 환호를 질렀다. 금성사 최초의 라디오인 ‘A-501’이 탄생한 것.

제품은 만들었지만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는 미군 PX 유출상품과 밀수품이 판을 치던 때라 국산 라디오의 품질을 믿고 선뜻 사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게다가 한 사람이 하루 종일 매달려 라디오 하나를 만드는 상황에서 가격을 낮추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연암의 뚝심은 이런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금성사 라디오는 이후 ‘A-401’ ‘B-401’ 등 7개 모델로 이어졌으며 선풍기ㆍ전화기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매경한고발청향(梅經寒苦發淸香)이란 말도 있지 않소! 지금 우리는 전자공업이라는 길 없는 밀림의 개척자인 기라. 일년 더 해보고 안된다 싶으면 그때 가서 내 손으로 문을 닫을 기요. 힘을 모아 일해주소.”

얼마나 힘겨웠으면 임직원들은 연암을 볼 때마다 어려움을 호소했는데 이때 연암이 꾸짖으며 했던 말이라고 한다.

62년 10월. 금성사에 낭보가 전해졌다. 미국 사이렌버그와 2년 동안 50만달러어치의 판매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연암은 “50만달러면 괜찮은 편이제? 소니ㆍ내셔널하고 당당히 경쟁하는 기다”고 말했다. 이미 연암의 가슴에는 일본 기업과 견줘 손색없는 기업이 되겠다는 목표가 세워져 있었다.

냉장고 개발에는 뒷얘기가 풍성하다. 64년 여름 고장난 냉장고로 고민하던 구정회 사장은 아예 냉장고를 만들 생각에 미제 톱날을 잘라 컴프레서의 밸브를 만드는가 하면 버려진 병기들을 녹여 사용하기도 했다. 결국 순수 국내기술로 냉장고를 만들고 에어컨을 만들어냈다. TV사업도 시작됐다. 라디오로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TV 부품의 절반 이상을 국산화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자 흑백TV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일본 히타치로 연수를 떠났던 직원들은 기술연수가 아니라 아예 기술을 몸에 배게 해서 돌아와 68년 8월1일 19인치 1호 모델인 ‘VD-191’을 만들어냈다.

“집에서 쉬기도 지루하제.”

65년 정월 초순. 연암은 겨우 사흘 쉰 구평회 전무와 한성갑 기획부장을 불러 새로운 사업거리를 내놓았다. 정유사업 진출 계획. 정부가 차관을 들여와 지원하는 것이어서 각 기업들의 샅바 싸움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기초닦기를 시작한 지 1년여가 지난 66년 11월17일 당시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은 여수 제2 정유공장의 실수요자로 락희화학 계열의 호남정유(현 GS칼텍스)를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2월20일 호남정유의 여수공장 기공식이 열린 여수 월내국민학교. 국내 기업 최초로 해외자본(칼텍스)과 합작한 호남정유의 시공발파 단추를 누르는 연암의 손은 이미 40년 뒤 여수산업단지를 그리고 있는 듯했다.

연암 구인회의 비즈니스에 대한 열성과 집념이 끝없이 이어진 결과다.



[인화로 일군 도전·개척 60년] <1>새 도전의 시작

"정도경영 위한 합리적 견제·합의 필요" 이사회중심 책임경영 도입
95년 구미공장 건설 LCD사업 메인 무대에 美 가전社 제니스 인수로 글로벌 전략 절정

김현수 기자 hskim@sed.co.kr



“정도경영과 과감한 도전으로 초우량 LG를 만들겠습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난 95년 1월. 구본무 회장이 취임하면서 밝힌 일성이다.

그룹의 이름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꿨으며 CEO 진용도 새롭게 구성했다. 창업원로들은 신세대의 활약을 기대하며 자연스럽게 일선에서 퇴진했다.

재계의 이목을 끌었던 LG의 세대교체는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탈각’의 과정을 거쳐 새 아침을 맞았다.

경영 전면에 등장한 신규 세대가 유독 강조한 것은 ‘정도경영’.

그룹 창립 50주년인 97년 3월 LG는 ‘이사회 중심의 선진국형 책임경영 체제’로 전환한다고 공표했다. 무소불위의 오너중심 경영시스템에서 합리적 견제와 합의가 중시되는 이사회를 경영의 핵심 지배기구로 작동시키겠다는 것.

당시 재계 주변에서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구 회장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는 것이야’ 하는 정도의 반응이 나왔을 정도다. 10년이 지난 지금 LG가 새롭게 길을 연 ‘이사회 중심의 책임경영’은 대부분의 기업들이 경영시스템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신사업을 향한 LG의 접근 노력은 다양하고 입체적이었다.

개인휴대통신(PCS)ㆍLCDㆍ민자발전ㆍ위성방송ㆍ멀티미디어 등은 구본무 회장 체제 이후 그룹이 새롭게 펼쳐가고 있는 첨단 비즈니스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LCD. 이 품목은 자본ㆍ기술ㆍ시장의 3박자가 모두 일치할 때 접근을 허용하는 초대형 프로젝트 사업이다. 90년부터 이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본격적으로 메인 무대에 접근하기 시작한 것은 95년. 그해 9월1일 구미공장에 TFT-LCD 공장을 건설, 노트북 PC용 9.5인치와 10.4인치를 각각 월 4만개, 10만개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에는 2차 생산라인을 준공, 노트북용 LCD 전품목 생산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시장에 LG의 이름을 각인시키기까지는 많은 탈각이 필요했다. 국가 외환위기 체제가 한창 지난 98년 3월 국내 단일기업 사상 최대인 16억달러 규모의 외자유치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상대는 필립스. 이후 1년5개월 만인 99년 8월10일 합작 본계약을 체결했다. LG는 필립스와의 합작을 단순한 지분 매각이 아닌 양사가 윈윈할 수 있는 전략적 제휴로 매듭을 지었다.

LG글로벌 전략의 백미는 95년 7월 미국 가전업계의 자존심인 제니스사 인수. 당시 제니스사 인수는 한국 기업의 해외기업 인수합병(M&A) 중 사상 최대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가전의 본토인 미국 기업을 인수했다는 점에서 세계를 경악시켰다. 제니스 인수는 한동안 ‘실패’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디지털가전 시대를 맞으며 LG가 기술원천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결정이 됐다.

이 시기 LG의 홈쇼핑 진출도 눈길을 끈다. 국내 최초로 하이쇼핑이라는 채널로 방송을 시작해 97년 LG홈쇼핑으로 사명을 바꾸며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 99년 3,150억원, 2000년 6,02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세계 3대 홈쇼핑업체로 도약했다.

LG는 구 회장 취임 이후 쉼없이 글로벌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95년 9월 동남아ㆍ인도 지역을 시작으로 인도네시아ㆍ중국 등으로의 진출전략을 잇따라 발표하는 한편 96년 7월 영국 웨일스에 종합가전단지 건설 계약을 체결한 데 이어 폴란드ㆍCIS 등으로 진출하고 미국 샌디에이고 CDMA 생산법인, 브라질 공장(마나우스 공장)을 설립하는 등 세계 곳곳에 LG의 전략기지를 만들었다.

구 회장이 취임 이후 단 한번도 빠지지 않는 행사가 있다. 바로 대학생 해외탐방프로그램인 ‘LG글로벌챌린저’ 관련 행사와 LG 글로벌 CEO컨퍼런스. 글로벌 경영에 대한 구 회장의 열정을 읽을 수 있는 단면이다.

정도의 길을 따라 기업의 체질을 개선시키고 21세기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새로운 사업을 과감하게 펼치는 모습. LG가(家) 3세대가 쓰고 있는 새로운 도전사(史)다.



[인화로 일군 도전·개척 60년] <2> 성장과 혁신으로 21세기 맞는다

88년 31개 계열사를 26개 사업문화단위로 재편…자율경영 체제 본격 도입
금성반도체로 첨단산업 도전 '1메가롬' 개발…석유화학 수직계열화 성공 글로벌사 발돋움



김현수 기자 hskim@sed.co.kr




“경영혁신은 끊임없이 더 높은 목표를 향하는 종착역 없는 여정이다.”(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지난 80년대 10년에 걸쳐 그룹의 발전 기반을 닦은 구 명예회장은 남들보다 한발 빨리 21세기를 향한 준비에 들어갔다. 84년 그룹의 이름을 럭키금성으로 바꾼 후 87년 지하 4층, 지상 34층의 여의도 트윈타워를 완공한다.

여의도 시대를 맞으며 럭키그룹은 전기ㆍ전자산업 분야의 경영혁신 프로그램인 F-88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21세기를 위한 경영구상에 돌입한다.

럭키그룹의 21세기 경영구상의 핵심은 자율경영과 고객가치경영, 인간존중의 경영으로 요약된다.

88년 선포된 자율경영은 독립된 계열사의 사업을 사업문화단위(CU)로 재편했다. 31개 계열사를 26개 CU로 재편해 각 CU장에 사업을 맡기는 것. 당시 구 명예회장의 조직 재편에 재계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친족간에 얽혀 있는 럭키에서 전문경영인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겠냐”는 것. 하지만 자율경영 이후 첫 인사에서 구 명예회장은 “친족이라고 특혜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경쟁해 똑같은 조건에서 본인의 능력과 자질을 평가받아야 승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구 명예회장은 자율경영을 골프에 비교한다. “코스를 설계하는 것은 나지만 플레이하는 것은 사장이다. 나는 OB(장외)만 나지 않게 하면 된다”고 말한다.

21세기 경영전략의 또 다른 핵심은 첨단산업의 진출과 글로벌화. 첨단산업 진출을 위한 첫발은 금성반도체 설립. 79년 대한반도체를 인수로 시작된 LG의 반도체 사업은 85년 미국ㆍ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1메가롬(ROM) 개발에 성공한다.

글로벌화의 토대도 마련한다. 82년 10월7일 금성사는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컬러TV 공장을 준공한다. 헌츠빌 공장 설립의 배경에는 선진국 장벽을 뚫고 중남미 시장 진출을 위한 A프로젝트가 있었다.

구 명예회장이 럭키금성그룹을 맡은 지 20년이 되는 90년. 플라스틱 빗으로 시작한 석유화학사업은 수직계열화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90년 폴리에텔렌(PE), 염화비닐수지(VCM), 스틸렌모노머(SM) 등 3개 공장과 열병합발전소를 완공한 데 이어 91년에는 석유화학산업의 기초인 나프타분해공장(NCC)를 준공했다.

여천공장 총무팀은 연일 벌어지는 준공식 행사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NCC에는 우여곡절이 많다. 당초 NCC가 계획된 것은 78년. 하지만 때마침 불어닥친 제2차 에너지 파동으로 83년 공장 건설이 백지화되는 시련을 겪었다. 10년을 잠자던 NCC 프로젝트는 87년 재인가를 받고 91년 8월 빛을 보게 됐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도 눈길을 돌렸다. 말레이시아에 플라스틱 가공공장인 럭키팜코와 지방알코올 생산공장인 헨켈리카를 설립한 데 이어 태국ㆍ인도네시아ㆍ헝가리ㆍ파키스탄ㆍ중국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글로벌 석유화학업체로 발돋움했다.

수직계열화를 위한 계열사 정비도 마무리했다. 91년 럭키를 중심으로 럭키소재ㆍ럭키제약을 합병하는 동시에 실트론과 금성통신의 세라믹 사업을 인수하며 신소재 사업으로 진출기반도 마련했다.

석유화학사업의 근간이기도 한 에너지 사업도 급성장했다. 91년부터 중질유분해시설(RFCC) 등 첨단 정유공장을 설립하고 폴리프로필렌ㆍ방향족 등 석유화학 원료사업에도 진출한다. 이러한 시설확장과 사업 다각화로 호남정유는 91년 정유업계 최초로 수출 5억달러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석유화학이 수직계열화되기 1년 전인 89년은 LG 60년 가운데 가장 뼈아픈 시련을 겪은 해다. 그해 1월 금성사 창원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89년 한해에만 3,882억원의 매출손실과 808억원의 경상이익을 날려버렸다. 구원투수로 투입된 이헌조 사장(전 LG전자 회장)은 노경화합문화를 만들며 금성사를 노사분규의 악몽에서 깨어나게 했다.

90년대 초반부터 창원ㆍ구미를 중심으로 공장을 확충하는 동시에 훗날 인수한 미국 제니스사와 협력해 첨단기술 개발에 들어갔다. 9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인공지능 세탁기도 이때 개발된 제품.

글로벌화도 발 빠르게 진행됐다. 8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교 보름스시에 VCRㆍ컬러TV 공장을 설립한 데 이어 영국 전자레인지 공장, 멕시코 TV 공장을 설립하고 동남아ㆍ중동 등으로 진출하며 21세기 경영을 준비했다.



[인화로 일군 도전·개척 60년] <3> 1등 LG를 향해서
"1등 경영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기업 되자"… 사업 차별화·인재양성 '올인'
글로벌네트워크 중심축 베이징트윈타워 건립
'파주 클러스터' 통해 상생 모범답안 제시도



김현수 기자 hskim@sed.co.kr


“일하는 방식과 사고의 틀이 바뀌지 않으면 1등 LG는 고사하고 ‘생존’을 걱정해야 할 지도 모른다.” (2005년 7월5일 월례 임원 세미나)
이 자리에 참석한 구본무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짧고 단호한 목소리로 과감한 변화를 요구했다.

LG그룹의 수장으로 올라선지 10년. 강산이 한번 바뀔 이 기간동안 지주회사 전환, GSㆍLS의 분가 등 LG에겐 숱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변화만 있었을뿐 그 결과에 대해서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몇몇 사업에서는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업이 환경 변화에 흔들리고 있었다.

“1등경영으로 1등LG를 달성하자.”

구 회장이 10년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1등 경영’이었다.

“지금까지의 경영활동을 경쟁사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더욱 체계적이고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구 회장이 임직원에게 설명한 1등 경영의 요체.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사업모델을 차별화하며, 핵심인재을 확보ㆍ육성하는 것이 절대 필요했다.

이듬해인 2006년 4월27일. LG는 세계 최대 규모의 LCD 생산시설인 파주 디스플레이 클러스트를 준공한다. 5조2,970억원이 투자된 파주 클러스트는 상생과 희망의 상징으로 부각됐다. 특히 공장 주변에 건설된 협력업체와의 동반자적 상생관계는 국내 기업들의 상생 모범답안으로 떠올랐다.

단단한 글로벌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1등 경영의 필수요소.

변화할 것을 주문한 2005년 11월 LG는 중국사업의 본산인 베이징 트윈타워를 준공, 글로벌 생산기지의 중심축을 세웠다. 중장기 청사진에 따라 중국을 발판으로 전세계에 생산 및 판매거점을 확보해 최종 네트워크를 완성한다는 계획을 구체화시켜 나가기 시작한 것.

이 후 계열사별 움직임을 살펴보면 LG가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얼마나 바빴는지 가늠할 수 있다.

주력 계열사인 LG전자는 중국시장 내트워크를 위해 선양, 텐진 등의 TV생산법인을 디지털라인으로 바꿨으며, 허베이성 친황따오에 주물생산라인을 건설했다. 또 러시아 시장을 겨냥해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 모스크바 루자에 공장을 마련했으며, 유럽전진기지로 폴란드 무와바, 보로츠와프를 선택해 디지털미디어 가전 생산기지를 가동했다. 미주시장을 염두에 둔 브라질 마나우스 생산기지도 이 즈음 조성을 끝냈다.

LG화학 역시 중국 진출 12년째인 2005년 중국지주회사를 설립하고 석유화학에서 2차전지, 편광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특히 PVC는 꾸준한 생산능력 확대로 국내 79만톤, 중국 34만톤을 생산해 세계 6위의 PVC업체로 도약한다. 또 수출시장 다변화를 위해 브릭스 시장 공략을 강화했다.

국내에서도 PDP사업에 집중투자해 벽걸이TV 대중화 시대를 여는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기반으로 수익성 확보를 서둘렀다.

구 회장이 10년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인 ‘1등 LG’. 이는 1등을 하겠다는 욕심보다는 경쟁사와 차별화된 시장을 창출해 ‘고객이 인정하는, 누구나 인정하는’ 기업이 돼야 한다는 화두이기도 하다.



60년 LG 인화로 일군 도전·개척 60년 <3부 2>동행을 끝내다

2005년 GS와 동업 매듭짓고 '각자의 길'
LG, 57년만에 '홀로서기'
97년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체질개선
2000년 국내 첫 지주회사 체제 전환도



김현수기자 hskim@sed.co.kr




“지난 반세기 동안 LG와 GS는 한가족으로 지내며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우뚝 섰습니다. GS가 새롭게 출발하는 것을 보니 남다른 감회로 가슴이 뿌듯합니다.”
지난 2005년 3월31일 서울 강남의 GS강남타워. 차분히 축사를 읽어가는 구본무 회장의 얼굴에는 57년의 역사만큼 만감이 교차했다. 57년간 손을 잡고 LG를 이끌었던 구씨와 허씨가(家)가 ‘아름다운 동행’을 끝내는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후손들이 재산분배를 둘러싸고 옥신각신 다투는 꼴을 보이지 말자는 양가의 깊은 배려가 현실화한 것이기도 하다.

여의도 트윈타워 동관 회장실과 강남 GS타워 23층 허창수 회장의 방에는 지금도 상대방에게 선물한 그림이 한점씩 걸려 있다. 각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동업정신만큼은 잊지 않겠다는 의미다.

LG그룹의 홀로서기는 이전부터 간헐적으로 진행됐었다.

양가의 분할이 결정되기 5년 전인 2000년 7월4일 LG가 국내 대기업으로는 처음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계열사간 복잡한 출자관계를 정리해 출자 부문과 사업 부문을 분할한 뒤 통합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후 3년간은 지주회사 전환을 위한 단계적 변화가 집중적으로 전개됐다. 2001년 4월 우선 화학 부문을 분할해 LGCI를 설립한 데 이어 1년 뒤 전자 부문을 분할해 LGEI를 만들었다. 다시 1년 뒤인 2003년 3월1일 LGCI와 LGEI를 합병해 지주회사인 ㈜LG를 탄생시켰다.

LG의 지주회사 전환은 한국 기업사의 큰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재벌기업들의 아킬레스건인 경영 투명성 문제를 해소하는 동시에 글로벌 무대를 향해 브랜드 경영을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LG의 지주회사 전환을 “전통적인 재벌과 결별하며 한국기업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그룹 분화 및 지주회사체제 전환은 사업규모나 영역뿐 아니라 사업 내용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대사건. 사전 준비가 철저히 이뤄지는 것이 필수요소였다.

살펴보면 97년 3월 LG가 대대적인 구조조정 계획을 선택한 것 역시 이 같은 장기 플랜의 시작이었다.

국가 외환위기의 암울한 전조들이 짙어가던 당시 LG는 주력인 LG전자의 미국 제니스를 연구개발(R&D) 기지로 만들고 금형ㆍ주물ㆍ물류사업을 분사하는 등 조직을 대폭 슬림화시켰다. 또 다른 주축인 LG화학은 비주력 사업을 정리하고 폴리카보네이트를 비롯한 엔지니어링 플라스틱과 정보전자소재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밖에 산업전자 부문을 LG산전으로 통합하고 LG금속을 매각했다.

한결같이 ‘조직에 깊이 스며든 지방을 근섬유로 전환’시키기 위한 선택들이다. 대수술을 앞둔 체력강화로도 읽힌다.

이 기간 동안 고통도 많았다. 99년 한국의 산업지도를 바꾼 ‘빅딜’의 결과로 LG가 반도체 산업에서 손을 떼게 된 것 등등은 지금도 LG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대표적인 아픈 기억이다.

“국내에서도 외국 1, 2등 업체와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서 경쟁력이 없는 사업은 포기하고 승부사업에 집중하겠다.” (구본무 회장ㆍ97년 3월 그룹의 대대적인 구조조정 계획을 밝히며)

선택과 집중에 의한 구조조정, 지주회사전환, 계열분리 이 모든 과정이 쉼 없이 달려온 LG의 60년이고 앞으로 맞게 될 100년의 밑거름이다.

● 아름다운 이별의 5가지 비결

▦합리적인 원칙의 인화

LG의 동업관계는 어정쩡한 가족주의나 온정주의가 아니라 상호합의한 원칙을 존중하고 지키는 책임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구본무 회장의 취임과 함께 창업세대들이 아무 말 없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것도 상호합의한 원칙에 따른 것.

이러한 원칙은 IMF 이후 사업매각이나 합작, 지주회사 전환 등을 잡음 없이 마무리지으며 세계 경영학계의 연구재상으로 떠올랐다.

▦엄격한 위계질서

구씨, 허씨 집안은 유교적 가풍으로 유명하다. 가족이 많다 보니 나이 많은 조카, 어린 삼촌이 허다하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조카가 '자네'라고 부르는 젊은 숙부에게 깍듯이 머리를 조아린다. 이런 전통은 57년 동안 흐트러짐 없는 동업을 이끌었다.

▦65:35의 비율

LG 동업의 또 다른 비결은 철저하고 엄격한 재산배분. 동업 초기부터 각 집안의 지분을 철저하게 관리해 아무리 많은 형제들이 경영에 참여해도 분란의 소지가 없도록 했다. 이러한 원칙은 이번 ㈜LG의 회사분할 과정에서도 분할비율 65:35로 지켜졌다.

▦역할분담의 미학

"경영은 구씨 집안이 알아서 잘할 테니 돕는 일에만 충실하라"라는 허만정씨의 말은 57년 동안 한번도 흔들림이 없었다. 세대가 바뀌어 고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과 구자경 LG명예회장은 50년을 한 직장에서 부대낀 둘도 없는 동지요 친구였지만 회사에서 허 회장은 구 명예회장에게 더없이 깍듯했다.

▦검증된 경영승계

LG의 오너일가들은 어느 기업보다도 혹독한 경영훈련을 받는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직에 오를 때까지 18년간 현장에서 실무경험을 쌓았고 구 회장은 20년간 과장ㆍ부장ㆍ이사ㆍ상무ㆍ부사장ㆍ부회장 등의 직위를 차례로 거치면서 영업ㆍ심사ㆍ수출ㆍ기획 업무 등을 두루 섭렵했다. 결코 무딘 칼을 만들어내진 않았다.



[인화로 일군 도전·개척60년] <4·끝> 고객과 함께하는 100년기업 LG

경쟁사가 따라올수없는 기술·제품·마케팅 무장 "LG를 고객가치 창출 상징으로"
1등 사업·제품으로 1등 브랜드 만들기 온힘
"차별화된 고객전략 마련을" CEO 변화 요구
'글로벌 챌린저' 행사로 미래인재 적극 육성도



김현수 기자 hskim@sed.co.kr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60년 동안 열어갔던 LG가 올해를 기점으로 고객가치경영을 목표로 100년 기업으로 우뚝 서려고 한다. 지난 99년 여름 충남 천안시 수향리 농장에 들른 구자경(왼쪽) 명예회장과 구본무 회장이 넉넉한 웃음 속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미래사회의 주역이 되려면 지식보다는 생각하는 힘과 도전정신을 길러야 합니다.”
지난해 11월2일 서울 여의도 트윈타워 대강당. 구본무 회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날 행사는 국내 최초의 최장수 대학생 해외탐방 프로그램인 ‘LG 글로벌 챌린저’ 시상식. 구 회장을 비롯해 계열사 CEO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대학생들의 사례 발표를 듣는 동안 구 회장은 연방 미소를 지으며 큰 박수를 보냈다.

글로벌 챌린지 행사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구 회장이 빠지지 않는 행사다.

‘100년 기업’ LG의 미래가 바로 젊은 인재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에는 글로벌 챌린지에 대한 구 회장의 애정에 호응해 학생들이 뜻깊은 선물을 전했다. 해외 연수를 다녀온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감사패를 제작해 구 회장에게 전달한 것. “미래를 보는 듯하다”며 구 회장은 기뻐했다. 구 회장은 이날 “LG는 앞으로도 여러분같이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우리 사회의 주인공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배움과 체험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날의 다짐은 미래 LG의 고객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2007년은 LG에 매우 중요한 한해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60년을 성장한 LG가 100년 기업으로 올라서기 위한 재발진의 출발점.

“지금까지 강조해온 고객가치중심 경영이 아직 뿌리내리지 못했고 차별화된 고객가치 창출을 향한 발걸음도 여전히 무거워 보인다. 당장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경영의 패러다임을 보다 철저하게 고객가치중심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경쟁사가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제품과 서비스로 LG를 새로운 가치창출의 상징으로 만들어야 한다.”

구 회장은 ‘100년 기업 LG’의 키워드를 ‘고객’이라고 말한다. LG의 도약을 위해서는 LG만의 기술, LG만의 제품, LG만의 마케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

LG는 올해를 환경변화에 순응해왔던 과거를 떨치고 고객이 원하는 제품과 트렌드를 남보다 한발 앞서 읽어 미래의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시점으로 받아들인다. 미래 사업 발굴을 위해 LG는 약점인 사업환경에 민감한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은 물론 계열사의 글로벌 전략도 한층 강화될 계획이다.

이 때문인지 구 회장은 올해 CEO의 역할을 유난히 강조한다. 글로벌 CEO 전략회의에서도 구 회장은 “CEO들이 각 사에 맞는 차별화된 고객가치 창출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철저한 실행방안을 마련하라”며 CEO들을 다그쳤다. 구 회장은 요즘 “5, 10년 전 관행을 고집하며 실수만 하지 않으려는 타성에 젖은 습관을 과감히 벗어던지라”며 CEO들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브랜드 전략은 구 회장이 100년 기업 LG를 위해 가장 신경 쓰는 부문이다.

브랜드의 연속성이 확보돼야 LG의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2007년은 GS와 LS에 이어 지난해 말 LG상사의 패션 부문 분리까지 완결하면서 진정한 ‘LG 독립 브랜드’로 출발하는 해다. 구 회장은 “1등 LG를 달성하는 데 LG 브랜드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1등을 할 수 있는 사업과 제품에만 LG 브랜드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LG의 60년 역사는 ‘희망의 다리’였다. 폐허에서 공장을, 수입에서 수출을, 단순 노동에서 기술을 만들어내며 한국 경제와 함께했다. 고객가치를 요구하는 LG WAY는 ‘100년 기업’ LG가 앞으로 갈 방향을 알려준다.

LG 창업의 모태인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세월이 지나 고속도로가 생겼다. 60년 전 산길을 돌아가던 길은 옛길로 남았을 뿐 드나드는 차가 많지 않다. 하지만 산길 모퉁이 하나하나마다 배인 연륜은 LG의 60년 역사와 함께했다. 기자가 승산마을까지 되짚어본 여정에는 100년 역사를 향한 LG의 새로운 비전이 오롯이 투영되는 듯했다.


Sunny Funny

Dreamy의 선별된 재밌는 이야기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837 We are the world. Dreamy 2009.09.12 8826 0
836 [2ch,감동] 미래에서 왔습니다 Dreamy 2012.03.14 5704 0
835 [2ch] 원숭이 판매 Dreamy 2008.07.28 6824 1
834 [2ch]한국의 노동사정 Dreamy 2009.06.22 8953 0
» [LG 인화로 일군 도전·개척 60년] - 서울경제신문 기사 모음 file Dreamy 2007.01.26 6341 5
832 [WBC] 다른팀 감독의 심정 1 Dreamy 2009.03.23 8128 0
831 [감동]우리나라 최초 해군함 701 백두산함(펌) file Dreamy 2006.05.12 5453 99
830 [골방] 적절한 비유 file Dreamy 2008.02.10 6203 39
829 [공포] 섬 Dreamy 2010.04.09 8517 0
828 [마린블루스] 정치 경시대회 file Dreamy 2007.06.26 9574 129
827 [마블] 아 나도 고기.. 이런방법이.. file Dreamy 2008.01.09 5866 49
826 [만화] 마주치던길 (오호호...) file Dreamy 2004.10.09 5909 108
825 [만화] 첫사랑 (오호...) file Dreamy 2004.10.09 7303 125
824 [백범 김구]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1945. 9. 3.) Dreamy 2007.03.27 5387 99
823 [백범 김구] 여러분들은 우리 새 나라의 기둥감들입니다. Dreamy 2007.03.27 5261 92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 59 Next ›
/ 59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