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Clouds

New Postings

  • 당신이 묵인하지만 않는다면, 그 누구도 당신을 해치지 못한다.
    - 일리노어 루스벨트


조회 수 1341 추천 수 0 댓글 0


51J5bwk8W8L._SX377_BO1,204,203,200_.jpg


선 고

 

화창한 봄철의 어느 일요일 오전이었다. 젊은 상인 게오르크 벤데만은 나지막하고 날림으로 지은 주택들 중 한 집의 이층 자기 방에 앉아 있었다. 주택들은 높이와 색깔만이 다른 상태에서 강을 따라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는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친구에 보낼 편지를 막 끝낸 참이었다. 그는 장난하듯이 느린 동작으로 편지를 봉하고 나서 팔꿈치를 책상에 괴고 창문을 통해 강물, 다리, 푸르스름한 빛깔의 건너편 강둑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친구가 고향에서의 출세에 만족치 않고 벌써 수 년 전에 도망치듯이 러시아로 가버린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지금 그 친구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점점 뜸해지는 고향 방문 때 하소연했듯이 사업은 처음에는 매우 잘 나갔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부진한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외지에서 헛수고만 하고 있었다. 낯설어 보이는 턱수염이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얼굴을 엉성하게 감추고 있었지만 누르스름한 안색은 병에 걸린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이 이야기했듯이 그곳의 교민사회와는 별다른 접촉이 없었고 국내의 가족들과도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 궁극적인 독신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분명히 곤경에 빠져 있지만 애석해할 뿐 도와줄 수 없는 그러한 남자에게 무엇을 써보낼 수 있겠는가. 혹시 그에게 다시 집으로 돌아 오라든가 생활터전을 여기로 옮기고 예전의 교우관계를 되살리는 한편으로 -여기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친구들의 도움을 믿어보라고 조언해야 할까? 동시에 이것은 배려할수록 더욱 괴롭히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그의 시도들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마침내 거기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와 영구 귀국자로서 뭇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게 될 터였다. 단지 그의 친구들만이 어느 정도 이해하는 가운데 그는 나이든 아이로서 고향에서 성공을 거둔 친구들 뒤를 쫓아다녀야만 할 것이다. 그에게 안겨주게 될 온갖 고통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 확실할까? 아마 그를 고형으로 데려오는 일 자체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스스로도 고향의 사정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차피 외지에 머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언들로 인해 기분이 상하고 친구들과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조언에 따른 결과 여기에서 -물론 고의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로서- 풀이 죽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면서도 그들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해서 수치심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고향도 친구들도 잃게 된다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외지에 머무는 편이 그에게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이러한 상황이라면 대체 그가 여기에서 실제로 출세하게 되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이유에서 서신왕래를 유지하고 싶다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기라 할지라도 주저할 필요가 없는 소식조차도 보낼 수 없었다. 그 친구는 벌써 삼 년 넘게 고향에 오지 않았고 이것을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과 결부시켜 궁색하게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그러한 상황이 한 소상인이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도 허용치 않았지만 수십 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세계를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삼 년 동안에 게오르크의 상황은 많이 변했다. 약 이 년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게오르크 어머니의 죽음과 그 이후로 게오르크가 연로한 아버지와 함께 살림을 이끌어온 일에 대해서는 친구도 들어서 알고 있었고 한 편지에서 딱딱한 어조로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사건에 대한 슬픔이 외지에서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으리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쨌든 그때부터 게오르크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업도 더 결단력 있게 처리해나갔다. 어쩌면 어머니가 생존해 계셨을 때 아버지는 사업에서 자신의 견해만을 관철시킴으로써 그가 실제적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방해했다. 아마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아버지는 여전히 사업에 관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나 있었다. 아마도 여기에는 -심지어 매우 그럴 듯한 일이지만- 다행스러운 우연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쨌든 사업은 이 이 년 동안에 예상외로 번창했다. 직원을 두 배로 늘려야 했으며 매출은 다섯 배로 뛰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또 다른 발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으로는 조의를 전한 예의 편지에서 그는 게오르크에게 러시아로의 이주를 설득하려고 했고 게오르크가 페테르부르크에 지사를 설치할 경우의 전망에 대해서도 상세히 말해주었다. 그 수치는 게오르크의 사업이 지금 벌어들이는 규모에 비하면 미미했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친구에게 사업적인 성공에 대해 써보낼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지금 사후에 그렇게 한다면 정말로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게오르크는 조용한 일요일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억 속에 두서없이 쌓이게 되는 것들과 같은 의미 없는 사건들에 대해서만 편지를 쓰는데 그쳤다. 그는 친구가 고향의 도시에 대해 오랫동안 품어왔으며 그 상태로 받아들여온 상상을 깨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게오르크가 상당한 간격을 두고 보낸 세 번의 편지에서 친구에게 아무래도 좋은 어떤 사람과 역시 아무래도 좋은 어떤 처녀 사이의 약혼을 알리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친구는 물론 게오르크의 의도와는 달리 이 기이한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게오르크는 그러나 바로 자신이 한 달 전에 유복한 집안의 처녀인 프리다 브란덴펠트 양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식으로 그러한 일을 편지에 썼다. 그는 이 친구와 특별한 서신왕래 관계에 대해 약혼녀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그는 우리 결혼식에 오지 않겠지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모든 친구들을 알아둘 권리가 있어요." "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게오르크가 대답했다. "잘 들어봐. 그는 모르긴 몰라도 올 거야.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어. 하지만 그는 강요를 받아 마음이 상한 느낌이 들 거야. 아마 나를 부러워하면서 분명히 불만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이러한 불만을 없애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혼자 다시 돌아가게 되겠지. 혼자 -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나 해?" "알겠어요. 도대체 그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들의 결혼에 대해서 알 수는 없나요?" "물론 나는 그것을 막을 수는 없어.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활방식을 볼 때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일이야." "그런 친구들을 둔 상태에서, 게오르크, 당신은 약혼하지 말아야 했어요." "그래, 그건 우리 두 사람의 책임이야. 하지만 나는 지금도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어." 그 다음에 그녀가 그의 키스를 받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래도 속상해요"라는 말을 끄집어낼 때면 그는 친구에게 모든 것을 밝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면 그도 나를 그렇게 받아들여야 해."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아마 나의 내면에서 현재의 나 자신보다도 그와의 우정에 더 적합한 인간을 끄집어낼 수는 없어."


실제로 그는 이 일요일 오전에 쓴 긴 편지에서 친구에게 약혼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 알렸다. "제일 좋은 소식은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네. 나는 유복한 집안의 처녀인 프리다 브란덴펠트 양과 약혼했다네. 그 집안은 자네가 떠나고 한참 뒤에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에 자네는 거의 알 수가 없을 거야. 때가 되면 내 약혼녀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전하겠네. 오늘은 내가 정말로 행복하고 우리들의 관계에서는 자네가 지금은 매우 평범한 친구 대신 행복한 친구를 갖게 되리라는 점만이 달라졌음을 알리는 것으로 그치겠네. 이밖에도 자네에게 진심으로 안부를 전하면서 다음번에는 직접 편지를 쓰려고 하는 내 약혼녀가 자네와는 허물없는 친구가 될 걸세. 그것이 독신자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을 거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자네가 우리를 방문하는 것이 힘들다는 점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바로 우리들의 결혼식이 모든 장애를 물리칠 절호의 기회가 되지는 않을까?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다른 것은 고려하지 말고 오직 자네 뜻대로 행동하게나."


손에 이 편지를 든 상태에서 게오르크는 얼굴을 창문 쪽으로 돌린 채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있었다. 친분이 있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골목길에서 인사했지만 그는 건성으로 미소를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방에서 나와 작은 복도를 가로질러 아버지의 방으로 갔다. 그 방에는 벌써 몇 달 째 들어간 본 적이 없었다. 또한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와는 상점에서 늘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시간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녁은 각자 알아서 챙겨먹었지만 그 다음에는 게오르크가 제일 흔한 경우처럼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약혼녀를 찾아가지 않을 때면 두 사람이 거실에 앉아 대부분 따로 신문을 읽으며 잠시 같이 지냈다.


게오르크는 아버지의 방이 이 밝은 오전에도 매우 어둡다는 것에 놀랐다. 좁은 마당 저편에 위치한 높은 담장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여러 가지 유품들로 꾸며진 한 구석의 창가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신문을 눈앞에 비스듬히 들고 있었던 것은 약해진 시력을 보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책상 위에는 아침식사 때 남긴 것이 놓여 있었는데 많이 드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 게오르크구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곧장 그에게 다가왔다. 아버지가 걷는 도중에 묵직한 잠옷이 펼쳐져 그 끝자락이 몸 주위에 나부꼈다. '아버지는 아직도 몸집이 대단한 걸.' 게오르크는 이렇게 생각했다. 

"여기는 지독히 어둡군요." 그 다음에 그가 말했다. 

"그래, 어둡긴 어두워." 아버지가 말했다. 

"창문도 닫으셨어요?" 

"그게 더 좋아." 

"바깥은 아주 따뜻해요." 그레고르가 그 이전의 말에 신경을 쓰는 듯이 말하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는 아침식사 그릇을 치우더니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원래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그레고르가 노인의 움직임을 멍하니 쫓아가면서 계속 말했다. "페테르부르크에 저의 약혼 사실을 알렸다는 거예요." 그는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약간 꺼내 보인 다음 다시 집어넣었다. 

"페테르부르크에?" 아버지가 물었다. 

"내 친구에게요." 게오르크가 말하고 나서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상점에서 그는 완전히 딴판이야.' 그가 생각했다 '여기서는 당당하게 앉아서 팔짱을 끼고 있는데 말이야.' 

"그래, 네 친구." 아버지가 힘주어 말했다. 

"내가 그에게 처음에는 약혼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는 것은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를 배려하는 차원에서였지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아시다시피 그는 까다로운 사람이에요. 그의 고독한 생활방식으로 볼 때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그가 다른 통로로 내 약혼에 대해 알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을 막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가 나 자신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지 못하도록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달리 생각하게 되었단 말이지?" 아버지가 묻고 나서 큼직한 신문과 안경을 차례로 창문턱에 올려놓고 손으로 안경을 가렸다.


"예, 지금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그가 좋은 친구라면 나의 행복한 약혼이 그에게도 경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에게 그것을 알리는 일을 더 이상 주저하지 않게 되었지요. 하지만 편지를 부치기 전에 아버님께 그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게오르크야." 아버지가 말하고 나서 치아가 없는 입을 크게 벌렸다. "좀 들어보거라. 너는 이 일 때문에 나에게 상의하러 왔구나.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대견한 일이야. 하지만 네가 진실을 다 털어놓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아니야,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쁜 일이지. 여기에 속하지 않는 문제는 건드리고 싶지 않구나. 소중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좋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어. 아마 그것에 대해 말할 때가 오겠지. 아마 그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올 거야. 상점에서는 내 눈에 띄지 않게 넘어가는 것들이 있어. 그것이 나에게 숨겨지는 일은 없겠지. 그것이 나에게 숨겨지리라는 가정을 하고 싶지는 않아. 나는 더 이상 기력이 왕성하지 않단다. 기억력도 떨어지고. 더 이상 그 수많은 모든 일에 신경을 쓸 수는 없어. 이것은 첫째 자연의 섭리이고 두 번 째로는 네 어머니의 죽음이 너보다는 나에게 훨씬 더 많은 타격을 입혔기 때문일 거야. 그러나 이 편지와 관련된 문제에서만큼은, 게오르크야, 부탁하건대 나를 속이지 말아라. 이건 아주 사소한 일이야. 한줌의 값어치도 안 되지. 그러니까 나를 속이지 말아라. 정말 페테르부르크에 친구가 있니?"


게오르크는 당황하여 일어섰다. "내 친구들 이야기는 그만 하지요. 수천 명의 친구들이 있다 해도 아버지를 대신하지는 못해요.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세요? 아버지는 몸을 충분히 돌보지 않아요. 하지만 나이가 있는 법이에요. 아버지는 상점에서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죠. 그건 아버지가 잘 아시잖아요. 하지만 상점 일이 아버지의 건강을 위태롭게 한다면 내일 당장 상점을 아예 닫아버리겠어요. 이런 식으로는 안돼요. 아버지를 위해 다른 생활방도를 찾아봐야겠어요. 근본적으로 말입니다. 아버지는 여기 어두운 곳에 앉아계시네요. 거실은 채광이 좋은데도 말입니다. 아침식사도 제대로 원기를 낼만큼 잡수시는 대신에 조금밖에 드시지 않아요. 아버지는 닫혀 있는 창문 옆에 앉아 계시지만 바깥 공기를 쐬면 좋을 거예요. 아뇨, 아버지! 의사를 부르겠어요. 의사의 지시대로 하면 될 거예요. 방을 바꿔야겠어요. 아버지는 앞방으로 옮기시고 제가 여기로 들어올 게요.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거예요. 모든 것을 함께 옮길 테니까요. 하지만 이 모든 일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지금은 잠깐이라도 침대에 누우세요. 아버지는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옷을 벗는데 도와드릴께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시게 될 거예요. 아니면 지금 앞방으로 가서 우선 내 방에 누우세요.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게오르크는 백발이 헝클어진 머리를 가슴 위로 숙인 아버지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게오르크야", 아버지가 미동도 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게오르크는 즉시 아버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피곤한 얼굴에서 눈가에 이르기까지 확대된 동공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너는 페테르부르크에 친구가 없어. 너는 항상 실없는 소리를 잘했고 나에 대해서도 자제할 줄 몰랐지. 대체 어떻게 그곳에 친구가 있단 말이니! 전혀 믿을 수가 없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버지." 게오르크가 말하고 나서 아버지를 의자에서 들어올린 다음 힘없이 서 있는 아버지의 잠옷을 벗겼다. "이제 곧 삼 년이 돼가요. 그 때 내 친구가 우리 집에 찾아왔죠. 아버지가 그를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다는 기억이 나요. 그가 내 방에 앉아 있었는데도 나는 아버지에게 적어도 두 번은 그가 없다고 말했어요. 나는 아버지가 그를 싫어하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내 친구는 독특한 면들을 지니고 있거든요. 하지만 그 다음에는 아버지가 다시 그와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당시에 나는 아버지가 그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질문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뿌듯했어요. 잘 생각해보면 기어나실 거예요. 그는 당시에 러시에 혁명에 관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했어요. 예를 들어 키예프로 출장갔을 때 폭동이 일어났고 이때 어떤 성직자가 발코니에서 손바닥에 칼로 넓은 십자가를 새겨 그 손을 치켜들고 군중들에게 소리는 광경을 보았다고 했지요. 아버지 자신이 이 이야기를 때때로 끄집어내곤 했잖아요."


그 사이에 게오르크는 아버지를 다시 앉히고 면팬티 위에 입은 트리코 천의 바지와 양말을 조심스럽게 벗기는데 성공했다. 특별히 깨끗하지 않은 속옷을 보자 그는 아버지를 등한시해왔다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아버지가 속옷을 갈아입도록 챙겨주는 일도 분명히 자신의 의무일 터였다. 그는 아직 아버지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약혼녀와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은연중에 아버지 혼자 옛집에 남게 되리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아버지를 앞으로 꾸미게 될 가정으로 모셔가기로 단호하게 결심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서 아버지가 받을 보살핌이 너무 늦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를 팔에 안고 침대로 데려갔다. 침대 쪽으로 몇 걸음 가는 동안 아버지가 자신의 가슴에 달린 시계줄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알아챈 그는 끔찍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아버지를 곧바로 침대에 눕힐 수 없었다. 그만큼 아버지는 시계줄을 꼭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침대에 눕게 되면서 모든 것이 잘 된 것 같았다. 그는 손수 이불을 덮으면서 이불자락을 어깨 위까지 끌어당겼다. 그리고 못마땅하지는 않은 표정으로 게오르크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그가 생각나지 않으세요?" 게오르크가 물으며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불이 잘 덮여졌니?" 아버지가 두 발이 제대로 덮여졌는지를 살펴볼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침대가 벌써 마음에 드셨군요." 게오르크가 말하고 이불을 더 잘 덮어주었다. 

"이불이 잘 덮여졌냐니까?" 아버지가 다시 한 번 묻고 대답에 특히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진정하세요, 잘 덮여졌어요." 

"아니야!" 질문에 대한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버지가 소리치더니 이불이 한 순간 날아가면서 펼쳐질 정도로 홱 젖혔다. 그리고 나서 침대에 꼿꼿이 섰다. 그는 한손으로 천장을 븥들고 있었다. "너는 나를 덮어주고 싶었겠지. 그건 나도 알아, 이 녀석아. 하지만 나는 아직도 덮여 있지 않아. 이게 마지막 힘이지만 너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해. 너를 상대하기에는 넘칠 지경이지. 나는 네 친구를 잘 알아. 그는 내 마음 속의 아들일지도 몰라. 그 때문에 너는 그를 몇 년간이나 속여 왔어. 다른 이유가 있겠니? 내가 그를 동정하여 울지 않았다고 믿니? 그 때문에 너는 사무실에 처박혀 있는 거지. 사장이 바쁘니까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러시아로 보낼 엉터리 편지를 쓰기 위해서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버지는 아들을 꿰뚫어볼 수 있어. 너는 지금 그를 수중에 넣었다고 믿고 있을 거야. 깔아뭉개도 괜찮을 정도로 말이야. 그는 꼼짝도 하지 않거든. 그래서 내 아들 결혼을 결심했단 말이지."


게오르크는 아버지의 소름끼치는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잘 안다고 말한 페테르부르크의 친구가 전에 없이 그를 사로잡았다. 드넓은 러시아에서 몰락한 그를 상상해보았다. 약탈당해 텅 빈 상점의 문가에 있는 그를 상상해보았다. 진열대의 잔해들, 찢겨나간 상품들, 떨어지는 가스등 받침들 사이에 그는 여전히 서 있었다. 왜 그는 그렇게 멀리 떠나야만 했단 말인가! 

"하지만 잘 보아라!" 아버지가 소리쳤다. 게오르크는 모든 것을 알아보기 위해 거의 정신없이 침대로 달려갔다. 그러나 달려가던 길 한가운데에서 멈칫했다.


"그년이 치마를 들어올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그년이 치마를 들어올렸기 때문에, 그 역겨운 여자가." 그가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팬티를 들어올리자 전쟁 때의 부상으로 인한 허벅지의 흉터가 보였다. "그년이 치마를 이렇게 들어올렸기 때문에 너는 그년에게 홀딱 빠졌어. 너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년과 재미보려고 어머니의 유품들을 욕보이고 친구를 배반하는가 하면 자기 아버지를 침대에 처박아놓고 꼼짝도 못하도록 했어. 하지만 꼼짝도 하지 못하던?" 

그는 완전히 자유로운 자세로 서서 두 발을 놀렸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게오르크는 가능한 한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한 구석에 서 있었다. 한참 전부터 그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관찰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우회하는 방식으로 뒤쪽이나 위쪽에서 급작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는 다시 이미 잊어버린 결심을 기억해냈다가 마치 짧은 실을 바늘귀에 꿸 때처럼 잊어버렸다. 

"그렇지만 친구는 배반당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소리쳤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의 집게손가락이 이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나는 여기 현지에서 그의 대리인이었거든." 

"코미디언이시군요!" 게오르크는 자기도 모르게 외치는 소리를 억제하지 못했다. 손해 볼 짓을 했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으나 너무 늦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혀를 깨무는 바람에 너무 아파서 몸이 구부러질 지경이었다.


"그래, 물론 나는 코미디를 했다! 코미디! 좋은 말이야! 다 늙은 홀아비인 이 아비에게 다른 위안거리가 있겠니? 말해봐라. 대답하는 순간만큼은 아들 구실을 해야지. 불성실한 직원에 진절머리를 내다 뼛속까지 늙어버린 나에게 이 뒷방에서 무슨 낙이 있겠니? 그런데 내 아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준비해온 거래들을 완결시켜놓고는 즐거움에 날뛰면서도 아버지 앞에서는 신사의 과묵한 얼굴을 하고서 시치미를 떼다니.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믿니, 너를 낳은 내가?" 

'이제 아버지는 몸을 앞으로 구부리게 될 거야.' 게오르크가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넘어져 망신창이가 되겠지." 이 말이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아버지는 몸을 앞으로 구부리기는 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처럼 게오르크가 가까이 다가오지 않자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 자리에 있어. 나는 네가 필요없어. 너는 네가 아직 여기로 올 힘이 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물러서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겠지. 착각하지 마라. 나는 여전히 훨씬 더 힘이 세다니까. 나 혼자라면 아마 굴복하고 말았겠지만 네 어머니가 나에게 자신의 힘을 보태주었거든. 네 친구와 나는 결속이 잘 되고 있어. 네 고객명단도 여기 호주머니 속에 있단다." 

"팬티 속에도 호주머니가 있다니!" 게오르크가 중얼거리며 아버지가 이러한 설명으로 그를 온 세상에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것을 잠시만 생각했다. 곧 모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네 신부와 팔짱을 끼고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해봐! 그년을 네 곁에서 쫓아내 버릴 테니. 두고 봐 !" 

게오르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버지는 자신이 한 말의 진실성을 강조하듯이 게오르크가 서 있는 구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이다.


"오늘 네가 나를 찾아와 친구에게 약혼에 관해 편지해야 할지 물었을 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이 멍청아.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단 말이야. 네가 나에게서 필기도구를 빼앗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편지했어. 그래서 그가 몇 년째 오지 않는 거야. 그는 너 자신보다 모든 것을 백 배나 더 잘 알고 있어. 그는 네 편지는 읽지도 않고 왼손으로 확 구겨버리면서도 오른손에는 내 편지를 들고 읽어본단 말이다!" 

그는 신이 나서 팔을 머리 위로 흔들어댔다. "그는 모든 것을 천 배나 더 잘 알고 있어!" 그가 소리쳤다. 

"만 배나!" 그는 아버지를 비웃기 위해 이 말을 했다. 그러나 그의 입 안에서 이 말은 매우 심각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네가 이 문제를 들고 나오리라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지. 다른 어떤 것이 내 관심을 끈다고 믿니? 내가 신문을 읽는다고 믿니? 여기 있다!" 그가 어쩌다가 침대 속에 들어가 있던 신문지 한 장을 게오르크에게 던졌다. 그것은 게오르크에게 완전히 낯선 이름을 지닌 오래된 신문이었다. 

"너는 뒤늦게 철이 들었어! 그 사이에 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말았지. 기쁜 날도 한 번 못보고 말이야. 친구는 러시아에서 망해가고 있어. 벌써 삼 년 전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어. 나는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너도 알 거야. 그만한 눈은 있겠지!" 

"그러니까 아버지는 나를 염탐해왔군요!" 게오르크가 소리쳤다. 

아버지는 동정하듯이 곁다리로 말했다. "아마 더 일찍 그 말을 하고 싶었겠지. 지금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더 큰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너도 너 외에 무엇이 있는지 알겠구나. 이제까지 너는 너밖에 몰랐어. 너는 원래 순진한 아이였지.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는 악마 같은 인간이었어! 그러니까 잘 알아둬라. 나는 너에게 물에 빠져죽을 것을 선고한다!"


게오르크는 방에서 쫓겨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뒤에서 침대에 쓰러지는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울렸다. 마치 경사진 평면 위에서처럼 층계를 급히 내려오던 계단에서 그는 아침에 집 청소를 하기 위해 막 위로 올려가려던 하녀와 부딪쳤다. 그녀는 "맙소사!"라고 소리치며 앞치마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는 벌써 나가버렸다. 성문에서 그는 뛰어내렸다. 그것은 강으로 향하는 차도 너머로 그를 내몰았다. 벌써 그는 굶주린 자가 음식을 움켜잡듯이 난간을 움켜잡고 있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부모의 자랑거리였던 뛰어난 체조선수로 자세로 몸을 흔들어 움직였다. 그는 점점 힘이 빠지는 두 손으로 아직 꽉 붙들고 있는 난간의 기둥들 사이로 자신이 떨어지는 소리를 쉽사리 들리지 않게 해줄 것 같은 버스를 엿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사랑하는 부모님, 당신들을 항상 사랑했어요." 그리고 밑으로 떨어졌다. 

이 순간에 다리 위에는 교통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69 일반 서울 맛집 리스트 Dreamy 2023.08.03 106 0
68 일반 맛있는 닭다리 간장 조림 Dreamy 2023.04.23 114 0
67 일반 DT71 미니 디지털 핀셋 사용 설명서 Dreamy 2023.02.03 252 0
66 일반 연어회 손질하기 Dreamy 2021.12.04 276 0
65 일반 크레시아 발성법 Dreamy 2021.08.18 663 0
64 일반 떡볶이 만들기 file Dreamy 2020.09.13 1079 0
63 일반 Ram pump 램펌프, Spiral Pump 스파이럴 펌프 file Dreamy 2020.08.18 1121 0
62 일반 테오 얀센 메커니즘 Theo Jansen's linkage file Dreamy 2020.08.17 1095 0
61 일반 경조사별 인사말 Dreamy 2019.11.05 1388 0
60 일반 SQ8 Manual secret Dreamy 2019.08.08 0 0
59 일반 외워두자 띄어쓰기 Dreamy 2019.03.21 1489 0
» 일반 Das Urteil 선고, Franz Kafka 프란츠 카프카 (전문) Dreamy 2019.02.01 1341 0
57 일반 각종 양념 레시피 file Dreamy 2019.01.08 1241 0
56 일반 학교 폭력 해결 방법 Dreamy 2018.07.06 1572 0
55 일반 집에서 두부 만들기 Dreamy 2017.09.12 1731 0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Next ›
/ 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