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택시가 안잡힐때...

by Dreamy posted May 2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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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밤 11시를 넘긴 번화가의 차도.
사람들 몇 명이 발을 동동 구르며 고개를 왼쪽으로 한껏 돌려, 오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다.
자가용이 지나가고, 아직 끊기지 않은 버스가 몇 대(하지만 그들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아닌) 지나가고, 이윽고 택시가 한 대 도착한다. 앞에 선명하게 떠 있는 붉은 글씨─'빈 차'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간다. 우선권은 가장 왼쪽에 서 있던 이(=가장 오래 기다린 이)가 가지고 있다.
택시의 조수석 창문이 살짝 열리고, 그곳으로 달라붙듯 뛰어간 사람은 외친다.
"목동이요!"
택시 기사는 고개를 좌우로 슬쩍 젓고는 앞으로 그냥 가 버린다(혹은 손을 휙 젓는다. 아예 그것도 없이 그냥 내버리듯 앞으로 가 버리는 경우도 많다). 거기에 다른 사람들이 또 달라붙어 각자 행선지를 외친다.
"화곡동이요!" "방화동이요!"
그 중 운 좋은 이(행선지가 택시기사의 맘에 든 이)에게 택시기사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 그 사람은 살았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어 택시에 올라탄다.
그리고 남겨진 이들은, 다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빈 차'라는 글씨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린다.
이번에 오는 택시의 운전수는, 내 행선지를 맘에 들어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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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신가요.
이걸 읽고서 '아, 맞아. 나도 그런 적 있어!' '정말 밤에 택시 잡기 힘들지...'라고 고개를 끄덕이실 분들이 꽤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버스는 끊겼고(더 늦은 시간이라면, 전철이 끊겼고) 집에는 가야겠고.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근처에 어디 묵을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택시 뿐인데......
밤에 택시 잡는 것,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꽤나 힘듭니다. 빈 택시는 그럭저럭 오는데, 문제는 거기에 대고 행선지를 말하면─그리고 그 행선지가 '안 좋은' 곳. 그 시간에 거기 가면 손님 태워 다시 나오기 힘든 곳이라면─택시 기사 분들은 거부의 뜻을 보인 후(혹은 무시한 후) 휭 가 버리는 경우가 정말 많지요. 그리고 그 시간대에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십중팔구 '주택가'.
네. '그 시간에 거기 가면 손님 태워 다시 나오기 힘든 곳'이라는 조건을 아주 멋지게 충족시키는 행선지입니다.
덕분에 밤 11시 넘어서 대충 지하철 역 근처에라도 나가보면, 위에서 묘사한 장면을 무삭제 생방송으로 볼 수 있습니다.
"XX동이요!" 휭~
"XX아파트요" 휭~
자신이 직접 그 상황을 당해보면, 밤은 늦었고 밤바람은 불고 다리는 아프고 피곤해 죽겠는데 택시는 안 잡히는 그 상황을 당해보면...정말 이렇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 듭니다.
"젠X. 따블 줄 테니까 우리 집 좀 가자! 응?"

저 또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을 자주 겪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막차를 놓쳐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필사적인 택시 잡기. 제발 부디 저를 거부하지 않을 다정한(?) 택시기사 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제 눈은 '빈 차' 글씨와 똑같은 색으로 벌겋게 핏발이 섰고, 태워주지 않는 택시를 한 대 한 대 떠나보내며 어느덧 소쩍새 울음소리와 함께 밤은 깊어만 갔습니다(번화가에 소쩍새가 있는지는 따지지 맙시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고 얘기하느라, 버스는 진작에 끊겨버린 어느 날.
저는 변함없이, 지나가는 택시들에게 러브콜을 보내며 서 있었습니다. 길바닥에서 택시 잡는답시고 보낸 시간만 30여 분.
이윽고 몇 번째인지 모를 택시 한 대가 '빈 차' 글씨를 빛내며 왔고, 저는 빼꼼히 열린 조수석 창문 사이로 몇 번째인지 모를 대사를 말했습니다.
"가양동이요"
그러자 얼굴을 확 찡그리는 택시기사 분.
에휴, 이것도 글렀구나...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기사 분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탄다는 거예요 안 탄다는 거예요?"
"아. 네? 아, 탑니다"
허둥지둥 문을 열고 탑승. 그리고 그 '탄다는 거예요 안 탄다는 거예요?'에 대한 감정이 제 머리 속에서 피어오르기도 전에, 택시기사분이 입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이, 집에 갈 거면 그냥 딱 하고 탄 다음에 '어디어디 갑시다'라고 말을 해야지. 왜 그렇게들 창문 너머로 '어디어디 가나요?'라고 묻기나 하는지 원"
그 말을 들은 저는, 쓴 웃음과 함께 답했습니다.
"택시 기사 분들이 행선지 말하면 안 태워주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죠"
솔직히, 살짝 비꼬는 어투로.
하지만 그걸 들은 택시기사 분의 코웃음.
"당신들 뭐 죄 지었어요? 돈도 없는데 공짜로 택시 타려는 거예요? 아니잖아요. 자기 돈 내고서 택시 타고 가겠다는 거잖아요"
"네. 그야 그렇죠..."
"그런데 왜 택시 기사한테 '어디어디 가 줄 수 있는지' 허락받고 타는 거예요? 네?"
.....................어라.
"내 그게 싫어서, 택시 잡고서 '무슨 동 가나요?'라고 묻는 사람은 일부러 안 태워요. 정당하게 탈 권리가 멀쩡하게 있는데 자기가 혼자 포기하는 거잖아요. 그건 내가 안 태워주고 가 버려도 아무 잘못 없지 뭐"
"그래도...좀 안 좋은 장소면 택시기사 분들이 안 태워 주시잖아요, 밤에는"
"그거야 당신들이 창문 너머로 '가줄 수 있냐'라고 물으니까 그렇지요. 그건 안 간다고 해도 승차거부가 아니거든. 대신에, 택시 와서 멈추면 묻지 말고 그냥 문 열어서 앉은 다음에 '어디어디 갑시다'라고 하세요. 그거 안 간다고 하면 '승차거부'에요. 신고할 수 있어요"
"신고...요?"
택시기사 분은, 조수석 쪽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스티커를 가리켰습니다.
《교통법규위반신고전화 국번 없이 120번》
"저기 120번으로 전화 걸어서 신고할 수 있어요. 차 번호판 말하고, 당시 상황을 차근차근 조리있게 설명하면 되요. 그러면 택시운전수는 승차거부로 벌금 물어야 되요"
택시를 타며 그 스티커를 본 적은 몇 번 있지만...그곳에 쓰여져 있는 '교통법규위반신고'라는 것에 '승차거부'도 포함되어 있음을, 왜 그 스티커가 택시 조수석에 떡 붙어 있는지는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물론 다짜고짜 신고하지는 말아야지. 만일 택시가 와서 문 열고 탄 다음에 '어디어디 갑시다'라고 했는데 택시 운전수가 '안 간다. 내려라'라고 하면, 조용히 말하세요. 싸움 나지 않게, 시비조로 하지 말고 점잖게 '아저씨, 혹시 지금 승차거부 하시는 건가요?'라고 말 해 보세요. 그러면 찍 소리도 못하고 태울 수 밖에 없어요"
"......"
"그걸 가지고 이 밤중에 서서, 지나가는 택시한데 '어디어디 가요?'라고 창문 너머로 물어만 본 다음에 보내버리고 있으니 뭐하는 짓들인지. 어디 한 번, 묻지 않고 그냥 탄 다음에 '어디어디 갑시다'라고 해 봐요. 그거 안 가는 택시기사 없어요. 안 가면 승차거부거든"
".........그런 건 처음 알았네요"
"대신 그게 무조건 먹히는 건 아니에요. 여기 밖으로...그러니까 서울시 밖으로 가자고 할 때에는 택시기사들도 못 간다고 할 수가 있어요. 손님이 지금 여기(서울)에서 탄 다음에 '경기도 김포 갑시다'라고 할 때, 택시기사는 그거 못 간다고 해도 되요. 그건 승차거부가 아니지, 법적으로. 아니면 서울에서 탄 다음에 부산 가자고 하는 것도 안 데려다 주면 무조건 승차거부가 되니까요"
"하긴, 그렇네요"
"그게 아니라면 돈 없이 탈 때 뿐이죠. 택시 타고서 '아저씨, 제가 돈이 없는데 집까지 좀 데려다 주실 수 있나요?'라고 하면 그건 안 태울 수 있죠. 뭐, 기사가 기분 좋으면 태워주는 거고. 아하하"
"아하하..."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런데요? 무슨 돈 없는데 공짜로 태워달라는 거래요? 뭐 잘못했다고 '어디어디 갈 수 있나요?'라고 물어서 탈 권리를 자기들이 버리냐구요"
"...잘 몰라서 그런 것도 있겠죠. 저도 방금 기사 분한테 그 얘기 듣기 전까지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는걸요. 다음 부터는 괜히 고생하지 말고, 그냥 문 열어서 딱 타 버린 다음 '갑시다'라고 해야겠네요"
"그게 당연한 거에요"


그리고 택시는 집에 도착했고, 저는 택시비를 지불한 후 내렸습니다.
택시기사 분에게, 좋은 것(?)을 알려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자기들이 잘 해야죠. '밤에 택시 잡기 어려운 문화'를 만들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택시 잡는 사람들 자신이에요. 자기들이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어디어디 가나요?'라고 물어보니까, 택시기사들도 행선지가 맘에 안 들면 거부하고 가 버리는 게 당연해 진 거지. 그래 놓고 나중에 택시 기사들 욕하면 뭐하나. 자기들이 그런 문화를 만들어서 자기들이 힘들어 하는 거지"



후일담
이 일이 있은 후로,
저는 한밤중에 택시 잡을 때 고생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예전에는 발을 동동 구르며 'XX동! XX동!'을 외치고 택시기사들은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그냥 가 버리는 장면을 연출했었지만...지금 저는 택시가 와서 멈추면 그냥 문 열고 타버린 다음 말합니다.
"가양동 가 주세요"
안 간다는 택시기사 분은, 단 한 명도 없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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