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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 그리핀

'오 마이 뉴스'에서 발췌.
정말 2002년 한해는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줬던 해인것 같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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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인터넷 민주주의를 아느냐
[속보, 정치] 2003년 01월 27일 (월) 09:18

우리는 2002년 한국에서 세계 최초의 인터넷 정치혁명을 보았다. 이 혁명은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자신들의 영향력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수구세력들에게는 악몽일 것이다. '조중동'이라는 종이신문지들과 그들 매체에서 자신들의 일방적 주장으로 여론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명망가들은 극도의 공포심으로 이제 인터넷 민주주의 그 자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말할 차례다. 너희가 인터넷 민주주의를 아느냐?

인터넷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자들은 인터넷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송복 교수는 "허위 사실의 제보며 유포는 어떤 미디어(조중동?-기자주)도 인터넷을 따라갈 수가 없다"고 한탄한다.


그에게는 인터넷이 오직 "포퓰리즘"과 "모든 살인기구가 동원되는 조폭시대의 언어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인터넷 세상의 자정능력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과연 그의 우려대로 인터넷은 자정능력이 전혀 없는 이성의 사각지대일까?


송 교수의 "사회적 철부지들"이라는 발언을 비판한 기자의 글이 나간 다음 많은 네티즌들은 기자가 송 교수의 발언내용을 비판의 텍스트로 삼지 않고 감성적 대응을 한 것에 대해 비판을 해왔다. 놀랍지 않은가! 네티즌들은 송 교수의 '욕설'과 '인격모독'까지도 비판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논리적 비판을 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런 일이 종이신문지라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인터넷 세상을 오프라인 세상의 하수도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네티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만 할 것이다. 송 교수보다는 몇 배는 더 민중들의 우매함을 염려했을 마키아벨리조차도 이렇게 말했다.


"사리를 판단해야 하는데 있어서도 민중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두 사람의 연설을 들었을 때 더 나은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기자는 인류 역사상 현재 인터넷 세상에서 실현되고 있는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주의적이었던 시공간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곳에서는 수십만, 수백만(인류 전체도 가능할 것이다)의 사람들이 동시에 모여 욕설(!)하고, 토론하고, 이해하고, 승복(추천)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해나간다.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가? 그들의 학력이 자신보다 못해 걱정인가?


송 교수의 말대로 "조작과 선동의 귀재들(누구였는가?-기자주)만 날뛰던 파시즘 시대"가 아니라 "규모와 효과면에서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규모와 효과면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공간에서 '모든 사람들'이 모여 그 "조작과 선동"을 가려내고 추방할 수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왜 인간의 이성은 오프라인에서만 작동하고 온라인 세상에서는 야만의 본성만이 작동한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익명성"의 부작용은 질의 문제가 아니라 양의 문제일 뿐이다.


아마도 두려움의 진정한 원천은 그것이 아닐 것이다. "인터넷 정치(참여민주주의-기자 주)는 … 어디까지나 대의정치의 보조적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송 교수와 같은 사람들은 인터넷 세상이 민주주의가 아니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이런 일은 역사를 통해 반복되고 있다. 권력을 잡기 전에는 언제나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언제나 대의제를 부르짖는다. '선택된 우리'가 잘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1774년 Bristol에서 대의를 주장할 때의 Burke는 이미 중세의회에 대리를 파견하는 평민의 입장이 아니었으며,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항했던 미국에서 대의제를 반대하며 한 목소리를 내던 미국의 혁명가들이 그들의 지배체제를 굳혀갈 때는 난데없이 영국의 논리(대의제)를 주장한다. 프랑스의 Sieyes라고 다를 것이 없다. 혁명 전 그렇게 제3계급의 부분이익을 주장하던 그가 막상 그의 헌법(제3계급의 헌법)을 제정할 때는 단호하게 인민전체의 의사에 대한 제3계급의 대의를 주장한다.


역사의 경과는 아주 분명하다. 대의제는 지배계급의 논리였으며 민주제는 이에 반대하는 논리였다. 그러므로 네티즌들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대의정치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의 보조적 기능'일 뿐이다.


우리를 더욱 놀랍게 하는 것은 송 교수의 "법치로 돌아(sic?)가야 한다"는 발언이다. 이 땅의 법치를 완전히 사망시킨 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한 사람이 김대중 정권의 법치를 문제삼는다. 어쨌거나 좋다. 법치로 돌아가자. "법과 제도는 누구에게도 투명하고 누구에게도 공평(sic!)하다"는 '사회학자'의 초보적 법이해로 네티즌들의 개혁열망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사람들에게 '권리없이 의무없고, 의무없이 권리없다'는 충고를 하는 것이 보다 '철든 사회'를 위한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러고도 여력이 있으면 '공평하지 않은 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그것이 개혁이다!


우리 사회의 20∼30대는 지금도 생명을 걸고 이 땅의 안전을 지키고 있는 세대들이고(물론 그러고 싶어도 몸무게 적어 면제되는 경우도 있다), 직장에서는 '연공서열' 때문에 가장 적은 임금으로 가장 효율적인 생산을 하고 있는(말하자면 가장 많이 착취당하고 있는) 세대들이며, 앞으로는 초고령화 사회의 부담을 통째로 짊어지고 나갈 운없는 세대들이다. 그들이 철부지들인가? "책임도 없고, 역할도 제대로 부여되지 않"았다고? 책임은 권리에서 나온다. 그의 말대로라면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중세의 농노들인가? 누가 그들에게서 권리를 박탈하고 있으며 박탈하려 하는가?


기자는 앞으로도 송 교수의 '욕설'과 '인격모독'에 대해서까지 이성적으로 논리적 대응을 하라고 요구하는 네티즌들의 성숙한 인격을 따라가기는 힘들 것이다. 다만 기자는 송 교수와 같은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제기할 반동적 히스테리를 듣고 '지난 일년동안 우리가 한일이 뭔가 잘못 되지 않았나'고 생각할지도 모를 소심한 <오마이뉴스>의 독자들(특히 욕설과 비판과 설득과 격려의 '리플'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가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책임감에서 그의 '욕설'과 '인격모독'을 비판의 텍스트로 삼아 이 글을 쓰고 있을 뿐이다.


단언하지만 '우리가 지난 일년동안 한 일을 그가 알고 있다'하더라도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다. 인터넷 정치혁명은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역사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좋은 세상을 바라지만 부끄러운 역사가 부여한 '명예' 앞에서 한없이 소심해지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예수가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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