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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찬란한 대화 모음집

2016.02.24 11:45

공기해장국 - 안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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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해장국

  - 안현미


빨간 색깔의 슬픔 한개와 일곱개의 계절어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러시아에서 왔다 우리는 그녀를 오로라공주라고 불렀지만
국립의료원 중환자실에는 위독한 어머니가 누워계셨다
신원미상의 행려병자로 실려온 분들의 이름 불상님 1 불상님 2
불상님 3…… 불상님들과 나란히 어머니의 이름이 있다 셀 수
없는 무한과 셀 수 있는 무한 그 사이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국립의료원 뒷골목 어두운 다방에서
오로라공주가 러시아어로 울고 있을 때 나는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 나혜석을 생각한다 쪼그려 앉아 걸레를 빨다가 머리가
쏟아질 듯 아파서 혼자 병원을 찾은 어머니의 담담함을
생각한다 보호자의 수술 동의서가 필요치 않았다면 알리지도
않았을 친정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한다 셀 수 없는 무한과 셀 수
있는 무한 그 사이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한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을 키웠지만 혼자 병원에 입원한 그녀는,
행려병자로 실려온 불상님들과 나란히 위독한 그녀는, 여러가지
색조의 무한과 두명의 딸 중 한명의 업둥이를 기른 적이 있는
그녀는, 동냥젖을 먹고 자란 내가 어쩌다 찾아가 사주던
공기해장국을 달게 먹던 그녀는, 공기해장국을 먹고 공기처럼
사라진 그녀는,

언젠가 나는 오로라공주처럼 낯선 곳에 도착해 운 적이 있다
불상님이 되어본 적이 있다 국립의료원 뒷골목 오래된 식당에서
공기해장국을 주문한다 그녀가 없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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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타전하다 


                                        안 현 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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